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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윤석열 끝났으니 이재명도 끝내자는 것인가

이하경 대기자
정치적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망상에 사로잡혀 내란을 일으킨 현직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자 일부 지지자들은 폭도가 돼 법원에 난입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몰락한 윤석열 대통령을 하루라도 빨리 추방하려고 핏발을 세워 왔다. 이제 속이 시원한가. 그는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재판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해야 한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민주당을 추월했다. 윤석열이 끝났으니 이재명도 끝내자는 것이 민심인가. 혼란을 정리할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윤·이에게 매달리며 상대에 삿대질
독재자와도 대화…양김 하나 만든
타협의 정치인 김상현 해법 절실
개헌 통해서 제7공화국 열어야

우리는 ‘1987년 체제’에 살고 있다.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모범국이었다. 다만 헌법을 고치면서 열망했던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 직선제에만 치중했다. 유신헌법의 제왕적 대통령제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권력이 발작을 일으켰던 원인이다. 대한민국을 리셋해야 한다. 개헌으로 제7공화국을 열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87년 5월 탄생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가 학생·시민들과 함께 6·29 항복 선언을 이끌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신인 김덕룡은 “민추협이 없었으면 신민당 창당도, 6월항쟁도 없었다. 후농(後農·김상현의 호)이 민추협 탄생의 일등공신이다”고 했다.

후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71년 대선후보 선출 역전 드라마를 만든 주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김대중은 김영삼을 불신했고, 민추협과 신민당에도 부정적이었다. 후농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 양김을 하나로 만들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렸다. 김대중은 85년 2·12 총선 나흘 전인 2월 8일 귀국했다. 후농은 귀국환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김대중을 신민당 돌풍의 주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신민당이라는 거대 선명 야당이 탄생했기에 87년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의 장기집권이 무산됐다. 87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던 후농은 김대중이 ‘4자 필승론’을 꺼내며 평민당을 창당하자 참여를 거부했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들어갈 때도 결별을 선언했다. 천하의 양김을 하나로 만들고, 거역한 정치인은 후농뿐이다. 이로 인해 인간적·정치적 상처를 입은 것은 그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후농은 타협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원칙은 타협하지 않았다. 1967년 후농은 돈키호테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유진오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을 약속받았다. 유진오도 동의했지만 당내 반발로 무산됐다. “사쿠라” 소리를 들었고, 화형식까지 당했다. 이때 박정희에게 “야당을 포용해야 한다. 야당이 왜 민주화 운동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박정희가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다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 투쟁을 하시오”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했다. 후농은 약속대로 72년 유신 반대에 앞장서 투옥됐다.

후농은 1979년 11월 보안사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엿새 되는 날 전두환 사령관에게 불려가 둘이서 양주를 마셨다. 꼬여버린 정국을 수습할 방안을 묻자 “정치적 반대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대타협을 하는 길밖에 없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전두환이 감옥에 보내자 그를 위해 “정치를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10·26 이후 재야 인사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 모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즉시 퇴진하라”고 했다. 그는 “군부가 나설 빌미를 준다”며 홀로 반대했다. 민주당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무리하게 탄핵했고, 중도층 민심이 떠난 장면과 오버랩된다. 이 대표가 “한 대행을 탄핵하지 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후농은 어릴 적에 껌팔이, 구두닦이를 했다. 땅굴을 파고 살면서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고향 장성에서 무의(巫儀)를 집전하는 ‘당굴’이었고, 한국전쟁 때 빨치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총살됐다. 와중에도 “나 혼자 밥을 해줬다”며 다른 여인들을 살린 의인(義人)이다. 후농도 휴머니스트다. 자기를 혹독하게 고문한 사람도 문상을 갔다. 보안사 요원들이 골병든 그를 집에 떨궈놓고 가려 하자 “당신들이 무슨 죄냐. 밥이나 먹고 가라”며 붙잡았다. 이들은 평생 후농을 존경했다.

명색이 헌법기관이라는 사람들이 이재명과 윤석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상대에게 삿대질한다. 구차하고 한심하다. 최근 후농 평전을 낸 김학민과 고원은 “그에게 정치란 선과 악이 서로 섞이고 소통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영역이었다”고 평가했다. 후농의 가톨릭 세례명은 베드로다. 허술하고 비겁하며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참회했던 인간적인 사도(使徒)여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함세웅 신부에게 고백했다. 유독 눈물이 많았지만 저 사나운 원수까지 품었던 정치인, 상처투성이인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휴머니스트의 생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하경([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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