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소년중앙] 지역대표 음식 먹으러 떠나요, 전국 역사·문화 곁들인 미식여행 되죠
한국식 짜장면의 탄생부터 지금까지근현대사 곁들인 맛있는 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여행(旅行)이라 하죠. 소중 독자 여러분은 여행을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동네나 한국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자연, 해당 지역·국가의 각종 문화유산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맛있고 이국적인 음식 역시 여행을 떠나는 중요한 동기이기도 해요. 미국 뉴욕 하면 베이글과 스테이크, 스위스 알프스 지역은 퐁뒤가 떠오르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나라 인천 하면 어떤 음식이 떠오르나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인천으로 미식여행을 떠났습니다.
문체부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방한 관광객 유치 전략의 일환으로 음식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새로 ‘테이스트 유어 코리아(Taste your Korea)’ 브랜드를 개발하고 ‘국가대표 음식관광 콘텐츠 33선’을 선정해 2024년 7월 10일 공개했어요. ‘국가대표 음식관광 콘텐츠 33선’은 지역 대표 음식, 지역 대표 제철 식재료, 지역 대표 전통주 등 3가지 주제로 구분되죠. 지역 대표 음식은 부산 돼지국밥, 수원 왕갈비 등 15종, 지역 대표 제철 식재료는 통영 굴, 홍성 새조개 등 15종, 지역 대표 전통주는 안동 소주, 양평 막걸리, 서천 소곡주 3종이 선정됐죠. 선정 기준은 지역 대표성, 외국인 수용가능성과 더불어, 현지 방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식재료의 제철 적합성 등입니다.
지역 대표 음식은 해당 지역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국가대표 음식관광 콘텐츠 33선’ 중 간장게장과 함께 인천광역시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선정된 짜장면이 좋은 예죠.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있는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의 유래와 역사는 물론, 관련 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는 짜장면박물관이 있어요. 김민영·이서준·최은서 학생기자가 찾아가니 이경희 인천 중구 역사문화해설사가 한자로 '공화춘(共和春)'이라고 적힌 커다란 현판 앞에서 맞이했죠.
인천 대표 짜장면 어떻게 전국구 됐나
짜장면박물관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고풍스러운 2층 건물인데요. 민영 학생기자가 "짜장면박물관이 이곳에 설립된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했어요. "이 건물은 본래 공화춘이라는 고급 요리점이었어요. 공화춘의 전신은 중국인 전용 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 있던 음식점과 호텔이 혼합된 숙식업소 산동회관으로, 1911년 산동성 출신 화교 우희광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 요릿집으로 개업했죠. 1912년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해 이름을 '공화국의 봄'이란 뜻의 공화춘으로 바꿨어요. 공화춘은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중국요리점으로 70여 년간 명성을 이어왔는데, 6·25 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을 대중에 보급하는 역할도 했죠."
이 해설사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조계지(租界地)와 화교(華僑)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외국과 통상을 위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가·개방한 항구를 개항장(開港場)이라 하는데요. 주로 개항장 근처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리도록 설정한 구역을 조계지라 해요.
짜장면박물관이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뒤 항구와 가까운 인천 중구에 각국 조계지가 생기고 1884년 이 지역이 청의 조계지로 지정되며 생겨났어요.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틀어 화교라 일컫는데, 1883년 말부터 청나라가 인천 조계지에서 영사 업무를 시작하면서 인천에 많은 중국인이 건너오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음식점·주택들이 들어서고, 상거래가 활기를 띠자 공화춘과 같은 유명 중국 요릿집도 개점한 거죠.
이 해설사와 함께 차이나타운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전시를 살펴보던 서준 학생기자가 "짜장면은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중국 어느 지방의 음식이며, 어떻게 우리나라의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됐는지" 궁금해했어요. "이곳은 항구와 인접해 무역이 활발했고, 배에서 내린 물건을 실어 나르려면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했어요. 이러한 역할을 중국 산동 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coolie)가 많이 담당했어요. 이들이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지앙미옌(炸醬麵·zhajiangmian)을 주로 먹으면서 이를 파는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둘 생겼고, 짜장면이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했죠."
당시 쿨리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을 보면 이들이 먹던 짜장면은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빈 형태였어요. "한국식 짜장면은 양파와 양배추 등 야채와 고기·해물 등을 듬뿍 넣고 캐러멜을 혼합한 춘장을 볶다 물을 넣어 짠맛을 연하게 풀어서 전체적으로 단맛이 나게 하죠. 짠맛이 강한 중국식 짜장면과의 차이점입니다."
이렇게 국내에 퍼지기 시작한 짜장면이 우리나라 외식 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이죠.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 회사를 차린 산동 출신 화교 왕송산이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캐러멜을 혼합해 만든 겁니다. 즉,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춘장이 탄생한 거죠. 두 번째는 한국전쟁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입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춘장의 탄생과 시중에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의 만남으로 짜장면이 한국인의 대표 외식 메뉴로 자리 잡을 수 있었죠.
1960~70년대 정부에서 시행한 혼·분식 장려 운동 역시 밀가루가 주재료인 짜장면이 한국인의 식생활에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혼식은 보리·콩·조 등 잡곡을 섞은 밥을 의미하고, 분식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하는데요. 혼·분식 장려 운동은 한국인의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내린 조치입니다. 이로 인해 밀을 활용한 제과업·제빵업·제면업이 국내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보리혼식과 분식장려', '혼·분식으로 식생활 개선하자' 등 당시 혼·분식 장려 표어들을 살펴봤습니다.
이렇게 한국식으로 변형이 된 짜장면은 소스·재료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진화했어요. 중국집에 가면 메뉴판에서 옛날짜장·간짜장·유니짜장·삼선짜장 등 다양한 짜장면을 볼 수 있죠. 이 해설사가 하나씩 설명했어요. "옛날짜장은 양파·양배추·감자를 굵직하게 썰어 춘장과 함께 볶다가 물과 전분을 넣어 만든 거고, 간짜장은 춘장에 물과 전분을 첨가하지 않고 기름에 볶아낸 것이죠. 유니짜장은 돼지고기를 곱게 갈아서 만든 짜장면이며, 삼선짜장은 새우·갑오징어·건해삼 등 3가지 이상의 해산물이 들어간 짜장면을 뜻해요. 쟁반짜장은 춘장과 면발을 함께 볶아낸 뒤 커다란 쟁반에 담아내며, 사천짜장은 고추기름을 넣고 볶아 붉은빛이 돌죠. 유슬짜장은 채소와 각종 재료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넣어 소스를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형태예요."
차이나타운 동화마을 연경에서 맛있게 짜장면을 먹은 민영·서준·은서 학생기자는 후식으로 탕후루를 하나씩 사 들고 근처에 있는 인천 개항장역사문화의 거리로 향했어요. 탕후루는 중국 북경 지역의 대표적인 간식거리인데요. 보통 명자나무·산사나무 열매에 물엿을 묻혀 굳혀서 만들죠. 최근 국내에서 탕후루가 유행하면서 파인애플 키위·딸기·포도 등 다양한 과일로 만든 탕후루도 쉽게 볼 수 있어요.
인천 개항장역사문화의 거리 중 일부인 인천 중구 신포로 23번길 부근은 인천의 근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과거 인천 본정통 은행거리라고도 불렸어요. 앞서 1883년 개항 당시 각국 조계지가 항구와 인접해 생겼다고 했죠. 청국 조계지 바로 옆에 일본 조계지도 있었는데요. 일본 조계지에 살던 일본인의 무역과 상업활동을 지원·보호하기 위해 은행을 설립하며 인천 본정통 은행거리가 시작됐죠. 즉, 조선인의 수탈을 위해 설립됐던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제18은행 인천지점, 제58은행 인천지점이 늘어서면서 하나의 거리를 조성한 겁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그중 대불호텔전시관·중구생활사전시관·인천개항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어요. 대불호텔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일본 나가사키 출신 무역 상인이 인천항을 드나드는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호텔 영업을 시작한 곳입니다. 1883년 개항 당시만 해도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데 12시간이 걸릴 정도로 교통수단이 열악했기 때문이죠.
인천의 대표적 서양식 호텔로 승승장구하던 대불호텔은 1899년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경쟁력을 잃었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서양인들의 왕래가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죠. 대불호텔전시관에서는 당시 서양인 손님들에게 제공되던 다과 세트, 이들이 머물던 서양식 객실을 재현한 전시물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대불호텔전시관 옆 중구생활사전시관에선 주거 문화, 식생활 문화, 여가 문화 등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다양한 생활상을 볼 수 있습니다. 민영·서준·은서 학생기자가 요즘에는 보기 힘든 직접 그린 영화 포스터, 구식 텔레비전, 쌀통 등을 신기한 듯 살폈어요. 또 중구생활사전시관에서 50여m 떨어진 인천개항박물관에서는 1904년 11월 취역한 대한제국 군함 광제호에 게양했던 가로세로 183.5×135.5cm의 대형 태극기, 1897년 사용했던 벽걸이형 전화기 등 우리나라 근대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살펴볼 수 있었죠.
동행취재= 김민영(충북 청주대성초 6)· 이서준(경기도 평촌초 6)· 최은서(경기도 행정초 4) 학생기자
성선해([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