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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황주리 화가
그날을 기억하는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친한 친구 몇이 모여 학교 뒷골목의 선술집에 앉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앞에 두고 김민기 작사·작곡의 노래를 들었던 것 같다. 대학교 4학년의 마지막 학기의 가을, 우리 중 누군가 오랜 부자유와 억압의 어둠을 깨고 드디어 빛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적어도 슬픔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날 이후로도 매일 최루탄 냄새로 눈이 아프던 시절, 나는 ‘성난 군중’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거리로 나간 젊은이들의 시위는 자유를 향한 일념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자기 안의 고독과 분노가 합쳐진 복합적인 감정의 표출이었다. 어쩌면 축제가 없던 시절, 그것은 고통의 축제라 불려 마땅했다.

K드라마 인기 상상 못했던 일
전장의 북한군 이유 모른 채 죽어
부조리한 정치 체제 개혁 공감

그림=황주리
대학원에 가서는 ‘브레히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퇴짜를 맞았다. “자네가 왜 이런 걸 쓰나?” 지도 교수님의 그 말이 참 오래 남았다.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책 좀 읽는 학생들은 대부분 좌파 지식인의 책들에 경도되어 있었고, 노동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기도, 혹은 겉멋이거나 유행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인간의 불행보다는 행복을 그리는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을 함께 품고 있으므로.

시간은 거짓말처럼 흘러, 10년 전 터키 여행 중 어느 적막한 시골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여점원이 활짝 웃으며 한국말을 공부하는 중이라 했다. 노트를 보여주는데 ‘서랑해요’라고 씌어있어서 ‘사랑해요’라고 고쳐 주었다. 일행과 함께 자동차를 세워놓고 쉬면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틀었다. 얼마 안 가 동네 젊은이들이 잔뜩 모여 음악에 맞춰 싸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후 쿠바에 가서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김치를 ‘차이니즈’ 김치라고 라벨을 붙여 팔기도 하던 80년대 말, 맨해튼의 한인타운에서 설렁탕을 먹으며 서울의 포장마차를 그리워하던 유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를 잔뜩 빌려다 보며 그 시절의 고독을 달랬다. 전 세계가 한국 드라마에 매료된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미래의 시간 2024년까지도 세상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도 몰랐다.

타인의 불운을 구경하길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전쟁 관광 상품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크라이나 전쟁터를 구경하는 상품인데, 주요 고객은 미국인과 유럽인이라 한다. 러시아가 민간인을 학살한 폐허의 현장을 보여주는 그 값은 한국 돈으로 22만원에서 37만원 사이이며 전선에 가까울수록 비싸져 최고 483만원에 이른다. 그 허무한 전쟁에 투입된 북한의 젊은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임기 4년 동안 여행할 수 있는 상품을 내놓은 미국 크루즈 회사 '빌라 비 레지던스(Villa Vie Residence)'의 크루즈 '빌라 비 오디세이'의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이쯤 되면 세상은 어디나 ‘오징어 게임’ 중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배를 타고 40개국을 여행하는 장기 크루즈 패키지 상품이 출시되었다. 1년짜리 상품의 이름은 ‘현실 도피’, 2년짜리는 ‘중간 선거’, 3년짜리엔 ‘집만 빼고 어디든’, 가장 긴 4년짜리의 이름은 ‘도약’이다. 다음 대선이 이루어지는 2028년 11월 이후 미국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어디나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된 세상에 증오를 여행으로 치유하는 이렇게 세련된 관광 상품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 제목을 여기에 소환한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계엄은 45년 전의 그때와는 분명히 다른 얘기다. 그걸 같은 선상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시대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의식은 그때 그대로 머물러있는 거다.

오래 살다 보니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돈키호테가 힘센 거대집단을 향해 계엄을 선포하는 건 처음 보았다. 계엄이란 대체로 힘센 권력이 힘없는 대중을 향한 것이 아니던가? 돈키호테는 풍차와 싸우는 중인데, 사람들은 서로 편을 갈라 서로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탄핵을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이 낯익은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자살·탄핵·실패를 전제로 한 계엄 등으로, 우리 대통령들의 불행한 운명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치 보복으로 점철된 이 나라의 부조리한 정치 체제를 전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에 100% 공감한다. 대통령이 탄핵 된 날 페이스북을 열다가 들뜬 축제 분위기 속에서 “탄핵은 기쁜 일이 아니라 슬픈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문장을 발견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득 슬픈 생각이 들었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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