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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지금 한국 현실 겹쳐 보이는 과대망상 ‘코’의 희비극

윌리엄 켄트리지의 ‘나는 내가 아니고…’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마음이 어수선한 요즘 같은 시기에 말을 걸어오는 작품은 따로 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제목은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馬)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이다.

1955년생인 윌리엄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0년대까지도 아파르트헤이트, 즉 차별적인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된 나라이다. 켄트리지의 부모는 흑인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법조인이자 활동가였다. 특히 아버지는 남아공 현대사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때 변호인단을 이끌었고, 감옥에서 사망한 흑인 인권 운동가의 죽음이 경찰이 발표한 단식 농성이 아니라 고문 때문이었음을 밝혀낸 변론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변호한 사람 중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세 명이나 된다.

얼굴 일부인데 얼굴 부정하는 코
본분 잊은 권력욕 비판 영상 설치

만델라 변호한 백인 변호사 아들
남아공 차별정책 비판해 명성

드로잉 반복하는 작품 제작 과정
과거 실수 답습 역사와 닮은꼴

유대인 후손 관찰자 성향 생겨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 설치 작품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의 스틸 컷, 200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다리를 올라가거나(위 사진) 말을 타는 코의 모습(아래 사진)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켄트리지의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 물론 흑인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관공서는 백인과 유색인의 입구가 분리되어 있고, 해변에도 전용 구역이 나뉘어 있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다른 백인 친구들의 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린 시절, 켄트리지는 부모의 서재에서 노란 초콜릿 상자를 발견하고 기대에 차서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살해당한 흑인들의 처참한 시신 사진이 있었다. 1960년에 일어난 학살 사건의 중요한 증거사진이었다. 인종 분리를 당연시하는 당시 백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가족이 오히려 소수에 속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의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조부모는 차별과 박해를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해 온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배경과 정체성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특권층이라기보다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삼자이자 관찰자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특혜를 받는 입장에서도 폭력과 불합리를 지속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하네스버그는 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도시였다. 금광 개발에만 몰두한 국가 정책 때문에 풍경은 삭막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켄트리지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드로잉을 좋아했던 그는 벽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 후 배우가 되기 위해 파리의 연극학교를 다니기도 하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일을 배우기도 했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껴 그만두었다. 좌절의 순간,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 원주민 화가들의 목탄 그림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빠른 스케치의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목탄이 삶의 불확실성과 임시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켄트리지는 빠르고 거칠게 그린 목탄 드로잉에 요하네스버그의 삭막한 풍경과 비극적인 역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로잉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여 흑백의 스톱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에는 설치와 퍼포먼스로 영역을 확장했다. 미술을 포기했던 시절에 연기와 연출을 공부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켄트리지의 예술은 1980년대 후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의 통제가 심해 어떤 형태의 체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사전 검열 때문에 신문의 한 면이 통으로 검정으로 찍혀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시기에 켄트리지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 남아공의 부조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점차 국제적 명성을 쌓아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러시아의 문학과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상 설치 작품이다. 제목은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할 때 쓰는 러시아 속담에서 따온 것이다. 왜 러시아일까? 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켄트리지는 종종 다른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특히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일화들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사회의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좌절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코’라는 단편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기겁한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이 매끈한 피부만 있는 것이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 그는 뜻밖에도 거리에서 고급스러운 제복을 입고 마차에 올라타는 자신의 코를 발견한다. 게다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계급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미친 듯이 뛰어서 쫓아가지만, 막상 코를 마주한 순간에는 멈칫한다. 보아하니 자기보다 높은 신분인 것 같아서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망설이다가 말을 빙빙 돌리며 아주 공손하게 묻는다. 실례지만 혹시 제 코가 아니신지요…? 하지만 뻔뻔하게도 코는 “저는 제 자신입니다”라며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코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날 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코를 되찾은 주인공은 높은 사람에게는 절절매고 낮은 사람에게는 호통치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골 소설 ‘코’에서 착안
윌리엄 켄트리지의 ‘코’, 200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켄트리지는 영상 설치 ‘나는 내가 아니고...’의 중심 소재인 코를 청동 조각으로도 만들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니콜라이 고골의 이 소설은 권력과 계급, 체면과 허세를 지나치게 중시한 당시 러시아 사회를 풍자한 것으로 해석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코를 괘씸해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코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바쁜 척하며 돌아다니는데, 높은 계급을 과시하며 하는 일은 지체 높은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코일까? “내 코가 석 자”, “콧대가 높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코는 대표성이 강한 신체기관이다. 몸 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작지만 얼굴 중앙에 자리 잡아 온전함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코가 스스로 독립된 존재라는 과대망상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돌아다니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망상과 욕심의 조합은 나는 내가 아니라는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현실 세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괴함이다.

켄트리지의 작품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여덟 개의 짧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자극(劇)을 연상시키는 흑백의 화면 위로 다리 달린 코가 걸어 다닌다. 사다리를 열심히 올라가다가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코. 말을 타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단상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코. 권력과 계급에 대한 집착은 우스꽝스럽지만 집요하다. 한편 다른 화면에서는 러시아 혁명기의 일화를 담은 이미지들이 빠른 리듬으로 흘러간다. 인간과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열망이 순식간에 좌절된 비극의 역사이다. 남아공의 유명한 작곡가가 만든 웅장한 배경음악이 작품에 서사를 부여한다. 초반에는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빠른 연주로 혼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이내 남아프리카 원주민의 조화로운 합창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처럼 느껴져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켄트리지의 작품은 우리가 역사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부조리함에 대한 우화이다. 그는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세상의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체득한 관찰자의 관조적 시선으로 눈앞의 불합리한 현실을 견뎌왔기 때문일 것이다.

켄트리지의 고향 요하네스버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만성적 범죄와 경제 침체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자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떠났다. 그러나 켄트리지는 지금도 요하네스버그에 남아 역사와 정치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실과 밀착된 그의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역사·미래 낙관도, 비관도 경계해야”
그렸다가 지우기를 거듭하며 만들어지는 켄트리지의 스톱 애니메이션처럼 역사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이어진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기도 한다. 실수는 그대로 되풀이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파멸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반복 재생된다.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기 분열과 책임 회피의 모습도 전에 본 적 있는 장면이다.

역사와 미래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켄트리지는 이렇게 답한다. 낙관주의는 위험하고 비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고. 혼돈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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