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영웅전] 창암 이삼만 명필
마음이 울적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면 나는 전남 구례 천은사(泉隱寺)를 찾아간다. 천주교 신자인데 불심이 깊어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사찰도 아름답지만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현판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이삼만은 평생 글씨만 쓰다 보니 벼루 세 개의 밑창이 뚫어졌다. 가난해 붓이 망가지면 칡 줄기를 잘라 곱게 찧어 전분을 풀어내고 섬유질만 다듬어 붓을 만들어 썼다. 이렇게 쓴 갈필(葛筆)도 명품이다.
그의 본명은 ‘바위에 낀 푸른 이끼’라는 뜻의 이창암이었는데 자기 신세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호가 삼만(三晩)만이었는데, 이는 공부·출세·혼인 이 세 가지가 늦었다는 자학의 뜻이 담겨 있다. 지금도 전주 재래식 집 문기둥에 ‘李三晩’을 글씨를 거꾸로 붙이는데 그의 부친이 뱀에 물려 죽어 벽사의 전통이 그렇게 남아 있다.
그토록 오연(傲然)했던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로 귀양 가는 길에 창암을 찾아갔다가 창암의 글씨를 보고 “밥은 먹겠군”이라고 말했다거나, 추사가 귀양에서 풀려나 상경하는 길에 창암을 찾아갔으나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나 묘비명을 써줬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내려갈 때 만났다는 말은 추사 측에서 만든 말이고, 올라올 때 비명을 써줬다는 말은 창암 측에서 만든 말이다. 창암의 비문은 추사체가 아니다.
전주 한벽당(寒碧堂) 밑 전주천 냇가에 매운탕 집이 즐비했는데, 그 길섶에 이삼만의 암각이 외롭게 서 있다. 곡성에 가면 옥과(玉果)미술관에 이삼만의 명품이 소장돼 있다.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화백이 평생 심혈을 기울인 창암 컬렉션이다.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이 고인의 것보다 더 비싼 세태에 누가 그 글씨를 보려 찾아가려나. 창암의 글씨 한 점을 서재에 걸어두어 보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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