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계엄 소동이 드러낸 한국 정치의 과제
이례적으로 긴 시간을 끌어온 사법 리스크에 대한 판결이 하나씩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한 것은 이재명 대표일 수밖에 없다. 2년 반 남은 대선 전에 유죄가 확정된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윤 대통령의 계엄선포가 불거졌다.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고, 사실은 자신이 가장 약한 고리였음을 고백한 셈이다. 27년 검사 경력 윤 대통령의 정치적 맷집이 이리도 약했다니.
야당의 주장처럼 김 여사 특검만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고 하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너무나 허술하다. 최정예 공수부대가 국회에 진입해서 애꿎은 유리창만 깨고 퇴각했다. 대통령의 긴급담화문에서 말한 것처럼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려는 것이었다면 계엄은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설사 본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같은 심정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충정이었을지 모르지만, 박 대통령이 2024년에 살아 돌아왔다면 계엄이라는 수단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엄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가 여섯 시간 만에 도로 집어넣은 윤 대통령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야당이나 일부 시민사회의 주장처럼 하야나 탄핵 이후 수사를 받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당과도 완전히 등을 돌린 채 고립되어 실질적으로 2선으로 물러나는 일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장 내각과 대통령실 전원이 사표를 낸다고 하는데,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혹시라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 여부는 일반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대선 일정을 하루라도 앞당겨야 하는 야당은 총동원령을 내릴 것이고, 국민의힘은 탈당을 요구한 대통령의 임기를 지켜야 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놓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거대한 오판을 했다.
계엄소동이 드러낸 우리 정치와 제도의 누적된 문제들도 되짚어봐야 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정치 신인이라는 점이다. 이회창, 노무현, 이명박, 안철수, 문재인, 윤석열. 하나같이 정치 신인이거나 비주류였다가 갑자기 조명을 받으면서 대선 후보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박정희라는 한국 현대사 최대 상징의 생물학적 재현이니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평소에 쌓인 정치에 대한 혐오가 정치 신인 선호로 나타나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검증되지 않은 신인을 뽑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이 더 큰 혐오로 바뀌는 것을 언제까지 반복할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판도와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의 조합들을 공부해 본 적이 없게 마련이고, 따라서 누가 그 분야를 잘 아는 인재인지도 모른다. 연구개발 예산 삭감이나 의대 증원 같은 느닷없는 정책의 돌출은 그래서 생긴다. 학자이긴 한데 공부는 안 하고 방송에만 나가는 사람이나 유튜브에서 본 사람을 데려다가 자리를 준다든가, 인재를 구한다며 정치 브로커 같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도 그래서 생긴다. 대통령의 세계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근거리에 제대로 된 전문가들이 있었다면 이런 엄청난 오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도입한 현행 정치제도들이 효용을 다해가는 것도 문제이다. 대표적인 것이 다수제 민주주의이다. 계엄 선포는 거대한 오판이었지만, 대통령 담화문에 틀린 말만 쓰여있는 것은 아니다. 야당은 가히 의회 독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회 권력을 남용했고, 그로 인해 정부의 정상적인 업무를 할 수 없었던 것도 일부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과격한 의회 권력 남용은 야당 대표의 방탄 때문이라는 것도 다수 국민의 눈에 뻔히 보였다. 다만 윤 대통령은 이런 문제들을 타협으로 풀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정치 신념이 부족했을 뿐이다.
야당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각 선거구에서 한 표만 더 받으면 의석을 싹쓸이하는 현행 선거제도와 관련된다. 전체 투표의 45%가 사표가 되어 날아갔는데, 50.5% 득표한 민주당은 국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회 권력이 0.73%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한 대통령의 독점적 행정권력과 적나라하게 충돌한 것이 이번 계엄소동이기도 하다. 선거 결과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분점하게 하는 제도의 도입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앞에는 포퓰리즘의 유혹이 기다리고 뒤에는 역사의 퇴행이 기다리니,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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