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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저 믿으시죠?" 거역하면 처단합니다

지난 2일 윤석열 대통령은 충남 공주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 공주산성시장을 방문해 DJ를 자처하며 ″열심히 일하겠다, 여러분들, 더 믿으시죠?″라고 했다. 그 다음날 밤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사진 대통령실]
아침에 SNS를 보니 다들 그저 "한심하고 어이없었다"고들 하는데, 난 간밤에 무방비 상태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선포 장면을 라이브로 지켜보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백번 양보해 "민주당이 판사를 겁박하고, 장관 탄핵 시도로 행정부를 마비시키고, 예산 폭거로 국가 본질 기능을 훼손한다"는 윤 대통령의 계엄 취지에 동의한다 치자. 아무리 그래도 세계 10대 경제 강국 선진국 반열에 오른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야당의 '입법 독재'를 친위 쿠데타를 통한 '계엄 독재'로 막겠다는 대통령의 폭주가 몽상에 그치지 않고 비록 짧게나마 버젓이 실행됐다는 게 공포스러웠다. 시장통 방송 부스에 앉아 상인들에게 "열심히 하겠다. 여러분들, 저 믿으시죠?"라고 마이크 잡은 바로 다음 날 안면 몰수하고 국가 위신을 시궁창에 처박고 국민 기본권을 유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 대통령이라니. 이런 불안정한 인물이라면 다른 비상식적 행보도 얼마든지 가능하겠다 싶었다.
민생 행보 후 표변해 계엄 선포
생뚱맞은 전공의 '처단' 포고령
국민 적대시 속내 드러났나

더욱이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거나 "범죄자 집단의 소굴""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등의 표현은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는 과격한 언사로 조회 수 장사하는 극단적 유튜버라면 또 모를까, 일국의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할 때 써야 하는 정제된 발언이라기엔 너무 거칠고 감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채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계엄 결정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계엄사의 1호 포고령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이나 비약이 아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로 상황이 종료된 지금이야 다들 어처구니없는 150분짜리 소극을 조롱하지만, 국회 출입문이 봉쇄된 상황에서 3일 밤 11시부로 발령된 박안수 계엄사령관 명의의 6개 항목 포고령이 막 공포됐을 땐 이 나라가 정말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국회 등의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위헌적인 제1항도 그렇거니와, 지난 2월 대통령의 일방적인 의료 농단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전공의를 콕 집어 언급한 제5항은 경악 그 자체였다.

대통령 입으론 분명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데, 여기에 왜 생뚱맞게 전공의를 언급하는지부터 아마 당사자인 전공의들은 물론 대다수 국민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 수련병원에서 사직한 전공의를 '파업 중'이라고 하질 않나, 계엄 소동 탓에 아마 수면 부족인 채로 다음날 출근해야 했을 병원이나 연구소·기업에 이미 다니는 사직 전공의들더러 '48시간 내에 본업에 복귀하라'니 윤석열 정부의 시계는 의정갈등이 처음 빚어진 지난 2월에 그대로 멈춰 있는 건가 하는 기막힌 상상까지 했다. 현실 부정이든 정보 부재든 의료계와 관련한 윤 정부의 왜곡된 상황 인식을 노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입하려는 군인들을 국회 보좌진 등이 막아섰다. 무장한 특수부대 군인들이었지만 이리저리 채이며 시위대에 맞기도 했다. 김성룡 기자
뭐, 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제5항 마지막 구절,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표현은 그냥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 명의이고 실제 작성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젯밤 상황을 복기해볼 때 포고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윤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거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그런 포고령에 전공의를 향해 굳이 '처단'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또 '위반자에 대해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며 한 번 더 '처단'을 반복했다. 일부에선 1979년과 1980년 계엄 포고령을 급하게 베끼느라 벌어진 일이라 추측하지만, 무려 45년 전 쓰인 과거 두 포고문조차 개별 항목에선 '금한다'거나 '불허'라는 표현만 썼다. 이런 상황에 비춰, 대통령이 평소 전공의뿐 아니라 국민 누구든 본인의 뜻을 거스르면 '처단'해야 할 적으로 여겨온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다.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도 용납하기 어렵지만, 비상계엄이라는 형식을 빌려 드러난 대통령의 이런 비민주적인 대민관을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도 어제(4일) 페이스북에 포고령의 '처단'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은 지난 2월부터 업무개시명령 이름으로 전공의를 수차례 위협한 바 있다"며 "금번 계엄령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땐 의료개혁으로 포장했지만, 이젠 "군사적인 강력한 제재로 굴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숨기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됐다"고 국회도 악마화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우리 국민이 경제·문화 등 다방면에서 피땀 흘려 이뤄온 빛나는 성과를 하룻밤 새 무너뜨린 괴물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 아니었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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