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문가비 득남 축하한다"…한 영화감독이 던진 잔잔한 파문
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일단 개념부터 정리해야 한다. 정우성 케이스는 혼외 자식의 문제가 아니다. 비혼 자식의 사례이다. 이 문제는 같은 것 같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 적어도 정우성의 연애, 사랑 얘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힘들다. 엄연한 성인들간의 데이트, 연애, 결혼과 비결혼 여부에 대한 합의, 그 결정, 후유증에 대한 독자적 판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타인의 과도한 관심, 간섭, 개입의 틈이 그다지 크지 않다. 이런 러브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의 에피소드로 큰 부피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여, 정우성의 러브 스토리는 대중의 관심에서 쉬이 사라질 공산이 크다. 다만 그의 막대한 재산, 향후 영화 제작이나 연출, 출연의 정도가 어떻게 될 것인 가는 상당 기간 촉각을 모을 것이다. 예상하건대 정우성은 자신의 회사 ‘아티스트 컴퍼니’의 운영에 당분간 집중할 것이며(정우성은 이정재와 공동 오너이다. 직함은 이사이다.) 출연보다는 연출, 감독에 더 공을 들일 가능성이 높다.
‘돈 컴 노킹’ 30년간 아들 존재조차 몰라
그리고 얼을 만나러 간다. 얼은 엠버(페어루자 볼크)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는데 하워드가 찾아 갔을 때 마침 이 연인 둘은 대판 싸우는 중이었다. 아래층에 자신의 친부가 찾아 온 것을 본 얼은 마치 여자 엠버에게 화를 내는 양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를 밖으로 집어 던지기 시작한다. 마치 당신은 들어 오지 말라는 양, 자신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양 온갖 패악을 부린다. 하워드는 얼이 길가로 던진 소파에 앉는다. 그리고 자식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길었던 낮의 해가 기울고, 밤이 찾아 오고, 동네 개가 옆에 와서 만져 달라 낑낑대다 가고, 그렇게 하루 밤이 지나고, 또 다른 해가 떠오를 동안 하워드는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 ‘돈 컴 노킹’의 가장 훌륭한 장면인데 30년간 자식을 기다리게 한 만큼, 그 자식을 하루 정도 못기다리는 애비는 사람도 아니라는 속내가 읽히기 때문이다. 하워드는 또, 스카이라는 어린 여성(사라 폴리)이 유골 단지 같은 것을 내밀며, ‘이건 내 엄마이고 나는 당신의 딸이에요’란 말을 듣고서야 찔끔찔끔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돈 컴 노킹’의 하워드는 자식이 태어난 지도 몰랐거나, 몰라라 했으며, 양육도 하지 않았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한때 최고의 스타였지만 이제서야 그는 자식들을 만난 후 아버지가 되고 남자가 됐으며, ‘그럴 듯한’ 사람이 된다.
정우성 같은 현대인들, 현대의 연인들은 그런 ‘하워드 같은 지경’의 ‘막 된’사람들은 아니다. 결혼 여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되 양육의 책임은 여건과 형편에 따라 잘 합의해 진행하려 한다. 새로운 시대의 ‘비혼 자식 양육론’이다. 전통의 도덕률로는 이런저런 시비가 있을 수 있으나 신세대의 사회적 규범으로는 그다지 비난 받을 일까지는 아니다. 어쨌든 아이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정체성을 부여받을 것이고 사랑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는 처첩(妻妾)과의 이중생활이라는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남성중심주의가 묻어 있다. 주인공 신호(신영균)는 아내(전계현)와 아이를 시골에 두고 서울에 나와 사업을 하면서 성공을 거둔다. 그 과정에서 그는 혜영(문희)을 사귀게 되고 아들 영신(김정훈)을 낳는다. 아내는 혜영의 존재를, 혜영은 아내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나고 신호는 아내에게 돌아 간다. 혜영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영신을 신호 아내에게 맡기지만 이 일련의 과정에서 두 여인은 피눈물을 흘리는 일을 겪는다. 신호의 아내는 영신을 자기 자식처럼 키우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친모의 품으로 돌아간다.
다시는 리메이크 안 될 ‘미워도 다시 한번’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은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 음으로 양으로 많았던 일부다처제의 위기를 반영한다. 2020년대에 한국 사회는 적어도 이런 부조리와 불합리의 관계는 벗어나 있다. 사람들은, 혼인이라 함은 적어도 두 사람간의 단단한 약속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일부일처의 제도에 자신이 없는 한 혼인보다는 비혼을 택하려고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따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같은 영화는 현 시대에서는 다시는 리메이크 될 작품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 신호가 혜영과 ‘새 살림’을 꾸릴 요량으로 아내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든지 하는 치정스릴러로 바꾼다면 영화화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악마성에 대한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로는 몽고메리 크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셰리 윈터스가 나왔던 ‘젊은이의 양지’같은 작품이 있다. 영화에서 남자는 새여자를 갖기 위해 옛 여자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역시 진부한 테마긴 하다.
영화 ‘맘마미아’는 아바(ABBA)의 많은 노래를 신나게 섞어 가며 딸 소피의 친부는 과연 누구인지, 그 미스터리를 푸는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그 흥미와 재미가 그야말로 삼삼하다. 비혼의 자식을 낳고도 비혼 커플이 우정과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자식이란 존재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글래디에이터2’의 막스무스 장군(러셀 크로우)과 루실라 공주(코니 닐슨)도 그 옛날 로마시대의 비혼 커플이다. 그들의 비혼 아들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아버지처럼 로마의 폭정에 맞서 싸운다.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다 도피시켰던 루실라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비혼이든 혼인 관계든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불변인 것이다.
이런 문제에 관해 국내 한 중견 영화감독의 SNS멘트가 눈에 띈다. 그는 ‘정우성 문가비 씨의 득남을 축하한다’며 ‘이를 계기로 우리도 외국처럼 결혼 이외의 관계에서 생긴 출산도 윤리적, 법적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지난 30년간 가장 아름다운 혼외 자식스토리는 프랑스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의 막내 딸 마자린 팽조에 대한 것이다. 1996년 미테랑 대통령이 죽었을 때 세계적 언론 ‘TIME’은 그의 관 앞에 고즈넉히 서서 추도를 하고 있는 마자린의 모습을 정면이 아니라 뒷 모습으로, 그것도 멀리서 찍은 사진을 스프레드로 실었다. 언론의 과도한 관심이 불편할 수 있고 불필요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였고 꽤나 찬사를 받았던 사진 저널리즘이었다. 우리도 이제 그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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