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의 퍼스펙티브] ‘상생기금’ 출연 압박 대신 채무 재조정 적극 활용해야
빚더미 소상공인·자영업자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거시경제 악화는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문부터 영향을 준다. 바로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다. 한국은행이 9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취약 자영업자’ 약 41만명의 대출은 올 2분기에 121조900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2조8000억원 증가했다. 이들의 대출 연체율은 같은 기간 8.2%에서 10.2%로 높아졌다. 취약 자영업자의 연체율은 2년 전 4% 안팎에서 두 배 이상 높아졌다. 취약 자영업자는 3곳 이상 금융회사에서 빚을 낸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하위 30%)이거나 저신용(신용점수 664점 이하)인 차주를 말한다. 코로나19 금융지원과 상환유예 등으로 근근이 버텨오다가 금리 급등과 내수 부진에 빚조차 갚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이 늘었다. 정부의 소상공인·자영업 지원정책은 부채 상환 유예, 상생금융을 통한 이자 부담 경감, 저리 대환 프로그램 등에 머물고 부채를 줄이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자상환 유예, 만기 연장은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대출 만기 연장, 원리금 상환 유예 같은 조치는 대출금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언젠가 갚아야 하므로 미봉책에 불과하다.
규제기관은 대놓고 은행 압박
이제 개인에 대해 채무 재조정(만기 조정, 이자 부담 경감, 원금 경감 등 다양한 조치)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정부와 여야 모두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을 위한 재원으로 은행 순이익에 주목했다. 규제기관 수장이 은행장들을 만나 ‘상생금융’ 얘기를 꺼내며 협조를 구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돈 내놓으라고 압박해 상생기금 출연 규모를 늘리고 있다.
은행 순이익 일부를 출연하는 방식보다 은행이 스스로 시장원리에 맞게 채무 재조정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은행 수익은 예대마진(p, 가격)과 대출액(q, 수량)에 의해 결정된다. 은행은 대출한 돈 중 일부는 돌려받을 수 없다. 부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부실을 고려해 수익의 일부를 대손충당금으로 적립해 둔다. 대출자산에 큰 부실이 발생한 것이 알려지면 예금자들이 예금을 찾으려 은행으로 달려간다(이른바 뱅크런). 은행 경영의 핵심이 바로 이 대출자산의 부실 관리에 있다. 대출자산의 연체율이 높아지거나 그럴 것으로 예상되면 대손충당금을 더 적립하는 것이다. 실제 부실이 발생하면 이 대출을 상각하고 그 손실을 대손충당금으로 상쇄하게 된다. 돈을 빌려줄 사람의 신용평가, 대출심사, 그리고 빌려 간 사람의 신용도 변화를 추적해 주기적으로 충당금을 적립하고 상각하는 것이 은행의 일이다.
개인도 사전적 워크아웃 가능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정부는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대출에 대해 6차례나 만기를 연장하거나 이자를 유예해줬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경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앞으로도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결과 은행 장부에 기록된 이 대출은 실제 부실률을 반영하지 못한 채 여전히 ‘정상 대출’로 분류된다. 은행자산의 건전성이 실제보다 좋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 대출은 어차피 못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익을 발생할 때 상각해 손실 처리하는 유인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법적 근거가 없다면 은행이 임의로 손익을 조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배임이 되거나 탈세·절세 혐의에 따른 가산세 추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23년 12월 ‘개인 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개인채무자보호법)’이 제정돼 채무 재조정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이 우려는 해소됐다. 이 법은 기업에 적용된 사전적 워크아웃 기회를 개인에게도 준다. 이 법에서는 채무자에게 조만간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때 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에 채무 재조정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채무자의 기본 권리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은행은 이런 요청을 받았을 때 무조건 채무를 재조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의 신용도 변화를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 금융 당국의 개입 없이 은행 자체의 판단에 의해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독일·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채무 재조정 요청권을 법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금융기관이 부실채권을 외부에 매각할 경우 이 채권이 외부기관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주기적으로 실사·확인하게 함으로써 금융기관이 자체적으로 상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처벌 강화해 도덕적 해이는 막아야
채무 재조정에 대해 성실히 원금과 이자를 납부한 사람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게 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초래해 건전한 금융 질서를 해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현행 법규에서는 개인회생제도를 악용해 의도적으로 관련 자료를 은폐하거나 허위로 제출할 경우 민·형사 처벌(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643조 사기회생죄 조항에 따라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과 함께 회생 자체를 중단하게 돼 있다. 이 조항의 벌칙을 강화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나 개인채무자보호법 대상은 3000만원 이하의 대출이어서 자영업자·소상공인 채무 재조정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다. 이 법에 기초한 특례법을 만들어 그 대상을 코로나19 금융지원 정책에 따른 자영업자·소상공인 대출에 대해 그 금액을 높여서 한시적으로 채무 재조정을 시행해야 한다. 상생기금 출연을 위해 규제 당국이 ‘협조’를 요청하거나 기여금 출연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 이익의 성격을 반영해 시장원리에 따른 자영업·소상공인 지원하도록 하는 정책이 요구된다.
금융위기·경제위기는 항상 실제 평가한 자산과 은행의 재무상태표에 기록돼 있는 자산가치의 괴리가 클 때 발생한다. 이 점을 정확히 알아야 위기에 맞는 정책을 통해 대비할 수 있다. 은행 경영의 핵심은 자기 고객의 신용상태 변화를 추적하고 그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는 대손충당금을 적립해 충격 흡수능력을 갖는 것이다.
소상공인·자영업자에 대한 정책 대출은 계속해서 만기 연장으로 고비를 넘겨왔다. 그러나 정작 은행은 그 신용도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은행 자체의 리스크 평가와 이에 대한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선제적 채무 재조정이 활성화하면, 은행은 채무 재조정을 요구한 고객의 신용 상황을 다시 한번 평가한 뒤 어떤 수단을 사용해 채무 재조정을 해야 할지 결정할 것이고, 이 결과 해당 은행이 가진 리스크를 스스로 파악하고 이에 대응할 방안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은행이 이자수익의 일부를 충당금으로 적립하고 위기 상황에서 이를 활용하는 것, 이것이 은행 이익의 특성에 맞는다. 채무 재조정은 위기 발생 이전의 사전적인 조치이다. 채무 재조정은 은행 외부에서 이자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 이자가 갖는 속성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정부의 가계부채 정책의 목표는 부채 자체를 축소하는 것이다. 원금 상환 유예, 이자 상환 유예, 만기연장 등의 정책은 부채 자체를 줄이지는 못한다. 돈을 빌린 소상공인의 경영상황이 개선되길 기대하는 것은 비가 오길 기대하면서 하늘만 보는 ‘기우제 정책’이다. 향후 발표될 소상공인·자영업자 대책에 이들의 부담 자체를 줄여주는 적극적 채무 재조정 정책이 포함되길 기대해 본다.
이용우 경제더하기연구소 대표·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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