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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내리막길 예감한 천재의 어머니 배 속 낙원의 기억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나는 천재가 되고 세상은 나를 찬양할 것이다. 어쩌면 경멸과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천재, 그것도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다. 확신한다.”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열여섯 무렵에 일기장에 쓴 내용이다. 그는 실제로 이 선언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카탈루냐 출신으로 20대 중반에 파리와 뉴욕에서 전시를 하고, 서른둘의 나이에 타임 잡지 표지에 얼굴이 실렸다. 그러나 성공 이후에는 우스꽝스러운 기행을 일삼아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달리라는 이름은 초현실주의와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그는 이 그룹에서 10년 만에 퇴출당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젊은 시절에 쌓아 올린 명성을 서서히 깎아 먹는 내리막의 인생이었다.

시대 급진성, 정신분석학 수용한
초현실주의파 대표해 벼락 성공

친파시즘 비판 속 그룹 퇴출 후엔
자기복제, 돈·명성 좇는 ‘광대’ 전락

출세와 세간의 기대, 작가 짓눌러
예술가와 작품의 동일시도 곤란

1936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사진가 만 레이가 찍은 사진이다.
달리는 1904년에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태어났다. 잘생긴 얼굴에 언제나 외모를 열심히 치장한 그는 학창시절부터 눈에 띄는 멋쟁이로 남녀 모두의 애정 공세를 받았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정통 미술교육을 받아 그림 실력이 탁월했다. 왕립 미술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선생들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 심사받기를 거부한 적도 있다.

그는 20대 초반까지는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하다가 25세에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입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초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성격의 예술사조로 본능과 무의식, 꿈의 세계를 탐구했다. 달리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빠른 속도로 그룹의 대표 얼굴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기괴한 광경을 완벽한 묘사력으로 그럴싸하게 그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마치 기분 나쁜 꿈을 꾸고 난 후의 잔상처럼 왠지 찝찝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뛰어난 테크닉,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 자기애로 충만한 괴짜 기질이 새로운 시대의 급진성과 맞아떨어져 천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1940년 작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194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삼성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기증한 달리의 회화 한 점이 있다. 제목은 ‘켄타우로스 가족’, 1940년 작이다. 1940년은 파리에 살던 달리가 나치 독일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해이다. 동시에, 그의 성공의 발판이 되어준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공개적으로 퇴출당한 직후였다. 한마디로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 그려진 그림이다.

작품을 보자. 해안절벽과 바다를 배경으로 말의 몸통에 인간의 상반신을 한 켄타우로스 가족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두건을 쓴 켄타우로스는 아기를 돌보는 보모, 나머지 둘은 엄마와 아빠인 것 같다. 유모와 엄마 켄타우로스의 뻥 뚫린 배에서 아기들이 드나들고 있다. 이들은 과장된 자세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달리가 1942년에 출간한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은밀한 삶』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37세에 발표한 이 자서전은 당시에도 큰 화제를 모았다. 자기애와 허세가 넘치고 민망할 정도로 솔직한 일화가 가득하다. 달리의 서술에 따르면, 그의 기억은 어머니 배 속에서 시작한다.

“추측건대 독자들은 세상에 나오기 전, 어머니 배 속에서 벌어지는 너무나도 중요한 인생의 시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 달리는 이 시기를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기억한다.”

달리는 어머니 배 속이 “기막히게 쾌적한 낙원이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뒷받침해 줄 학문적 근거로 정신분석학자 오토 랑크(1884~1939)의 『탄생의 트라우마』를 언급한다. 랑크는 출생 자체가 강력한 정신적 외상이며, 유아기 때 엄마와의 분리가 성장기 아이의 정서적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했던 초현실주의는 당대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우상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간 적도 있고 자크 라캉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출생의 트라우마와 분리불안에 대한 랑크의 이론에는 특히 감명을 받은 것 같다.

켄타우로스 배의 구멍은 육아낭
1933년 파리의 초현실주의 그룹. 앞줄 가운데가 달리, 그의 왼쪽이 앙드레 브르통, 오른쪽이 막스 에른스트와 만 레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렇다면 그림 속 켄타우로스의 배에서 아기가 나오는 것은 출산의 장면인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원제는 ‘육아낭이 있는 켄타우로스 가족’이다. 켄타우로스의 배에 뚫린 구멍은 캥거루와 같은 유대목 동물이 새끼를 넣어 다니는 육아낭을 달리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에 대하여, “새끼들이 어미 몸에 달린 주머니를 간헐적으로 들락거리는 피신처로 삼고 이런 식으로 외부 세계에 서서히 익숙해진다”고 표현했다. 육아낭은, 말하자면 출생으로 인한 분리의 충격을 완화해주는 장치이다. 이것을 주머니가 아니라 뻥 뚫린 원으로 그린 것은 절단된 신체 등의 기괴한 형상을 즐겨 그린 그의 초현실주의적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그림의 배경은 달리의 고향 카탈루냐의 해안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는 “내게 경치는 이곳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나 스페인 내전 때는 파리로, 2차대전 발발 후에는 미국으로 피신했다. 이런 달리를 겁쟁이라고 비난한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겁이 많았고 항상 불안해했다. 파리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동행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동동거렸고, 머리 뒤에 빈 공간이 있으면 불안감을 느껴서 항상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니 비록 미국으로 피신했지만, 전쟁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 속 동물인 켄타우로스는 달리가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린 적이 없는 소재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달리의 이전 작품들보다는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 더 가깝다.

애완 동물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한 1965년의 살바도르 달리.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달리는 자신은 이제 초현실주의를 버리고 고전주의 풍으로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사실 바로 전해에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그룹의 동료들은 달리가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었고 파시즘에 우호적이라며 비난했다. 그룹 내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였던 달리는 자신이 곧 초현실주의이기 때문에 이제 초현실주의는 죽었다고 허세를 떨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상처가 났을 것이다. 그는 스물다섯에 그룹에 가입하면서 두 번째 삶을 얻었다고 느낄 정도로 초현실주의에 심취했고, 그 토양 위에서 자신의 예술을 싹틔웠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불안과 상실감이라는 감정이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고향과 동료, 안정과 소속감. 그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극대화된 내면의 불안을 대면하고, 그 근원적 원인을 랑크의 트라우마 이론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영원한 도피처로서 어머니의 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 여동생과는 의절했지만, 열여섯 살에 여읜 어머니에 대해서는 항상 그리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초현실주의 시절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그림이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탈퇴한 이후,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린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은 마다치 않았고 언제나 대중의 관심을 갈구했다. 작품은 자기복제와 매너리즘의 늪에 빠졌다. 갑자기 국제무대에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천재 화가는 부와 명성을 얻으며 점차 셀럽이자 광대로 변해갔다.

달리의 삶과 예술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시대가 원하는 바와 일치할 때 예술가는 성공을 거두고 전성기를 맞는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성공은 대체로 예술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의 삶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특히 역사적 혁신을 이뤄낸 예술은 그 자체로 예술가와 동일시되기에 더하다. 결국 예술가는 자신이 이뤄낸 성취, 그리고 세상의 기대에 휘둘리고 때로는 짓눌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괴물처럼 변해버리면 세상은 당황한다. 예술가와 작품을 떼어놓고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도 일어난다.

오웰 “달리 자서전은 악취 나는 책”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은 앞서 언급한 달리의 문제적 자서전을 읽고 서평을 하나 썼다. 자아도취에 빠진 화가가 상식을 벗어난 자신의 기행을 낱낱이 기록한 이 책은 그를 꽤 심란하게 한 것 같다. 책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오웰은 달리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다. 그리고 형편없는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훌륭한 예술 사이의 괴리에 대해 고민한다. 쉬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예술가에게 보통 사람 이상의 특권을 주어서도 안 되지만, 부적절한 언행을 이유로 그의 예술을 무시하거나 탄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다만, 이런 괴리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개인의 심리, 그리고 시대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오웰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한 인물과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쉬운 말들로 평가하기 전에, 그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태도이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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