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광장] 기회를 놓치지 말라
황해도 몽금포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열일곱 살 때 혼자 월남한 오리지널 탈북민이다. 일명 실향민이라고 부른다. 함경도 사람들은 떠들썩한 흥남 철수 작전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고, 황해도 사람들은 조용한 서해 철수 작전으로 군산이나 인천으로 가서 정착했다.
인천과 부평에는 미군 부대가 많아 취업이 쉬웠다. 장교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영어를 잘해야 진급할 수 있었다. ‘Swim or sink(수영하지 않으면 익사하다)’는 심정으로 공부해 통역사 시험에 합격했다. 미군 부대에서 수송부 배차원이 되었다. 하는 일은 운행증을 발부하고, 한국인 운전사를 위한 통역 서비스였다.
하루 24시간 운영하는 배차 사무실에서 두 번째 당번을 자원하여 오후 6부터 12까지 일을 했다. 밤에 일하고 낮에 공부할 기회가 왔다. 외국어대학 영어과에 입학했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할아버지는 공부했는가.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통역할 만큼 영어 구사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 공부하지 않아도 학점을 따는 데 문제가 없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필요한 출석일 수만 채우고 등교하지 않았다.
사실은 인천에서 기차 통학이란 쉽지 않았다. 밤 한 시에 퇴근하여 세, 네 시간 자고, 한 시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이문동까지 한 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 항상 피로하고 잠이 모자랐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외 활동이다. 외대 학보 발행, 모의 유엔 총회, 동시통역 서비스와 국제 웅변 클럽 훈련 등 영어 구사력을 국제 수준으로 향상할 기회를 모두 놓쳤다. 그때 동시통역 서비스를 연습한 친구는 나중에 국제무대에 진출했다.
할아버지가 그때 영어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좀 더 상위급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국방부 민간인 직원으로 겨우 대위에 해당하는 직급으로 은퇴했다. 내가 존경하는 연방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고 전신애 전 노동부 차관보, 그리고 강석희 현 조달청 서부 지역장이 있다.
너희들에게 말한다.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 없다(No cross, no crown)’이다. 공부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할아버지처럼 한 번 오판하면 그 결과는 심대하다. 마치 철로의 각도가 벌어지면 무한하게 벌어지는 것처럼.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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