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새벽은 오고야 만다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안고 아버지가 뛴다. 히잡을 두른 여인은 아이 대신에 자기를 죽이라고 군인에게 절규한다. 병원이 폭격당하고 아파트도 무너졌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뉴스가 나온다. 나는 체한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 온다. 철나고 평생 들어왔던 팔레스타인 문제다. 평소에 무심히 넘겼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작년 10월부터 뉴스를 지나치지 못했다. 거리마다 죽음이 무더기 휴지처럼 뒹굴었다. 흰 포대 속에 싸인 자들이 내다 만 신음이 나를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쉬지 않고 떨리는 진동 소리로 변하여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분노와 함께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이 몰려왔다.
이 땅은 원래 누구 것인가? 왜 땅 하나에 두 나라가 들어가 있는가? 영국 정부에서 1917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 영토에 유대 국가를 약속했다. 팔레스타인 땅 전체가 아닌 ‘일부’에 수립을 지지한다는 선언이다. 문제의 소지는 그때부터 있었다. 전 세계에서 흩어져 있던 유대인은 자치 국가의 꿈을 안고 이주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이 선언을 할 당시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다. 아랍인 70만 명이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이주 초기에 아랍인과 유대인은 친구처럼 잘 지냈다. 저녁이면 텐트에서 술을 나누면서 덕담을 하는 좋은 이웃이었다.
1948년에 영국이 팔레스타인 신탁통치를 끝냈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선언하자, 네게브 사막 근처에서 이집트와 말썽이 생겼다. 이것이 1948년 1차 중동 전쟁의 시작이다. 몇 차례 전쟁을 겪는 동안에 대부분의 땅이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 가자 혹은 주변국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근거는 무엇일까? 세 가지 담론이 있다. 약속된 땅 가나안의 회복 담론이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선조가 지나갔던 가나안을 되찾는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황무지 개간 담론이다. 낙타를 데리고 사막을 더욱 황폐하게 하는 베두인에게 이 땅을 버려둘 수 없다. 기름진 땅으로 만들어서 흩어진 유대인을 다시 모은다는 생존권이 걸린 담론이다.
글을 쓰고 있는 새벽에 문자가 들어왔다.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강의하는 전승희 교수님이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쉬블리가 2024년 아시아 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이다. 나는 ‘교수님 축하드려요’ 라고 답했다. 전 교수는 쉬블리의 소설 ‘사소한 일’을 한국어로 번역한 분이다. 소설은 양쪽의 입장에서 서사를 펼친다. 이스라엘 점령군 장교와 팔레스타인 지식인 여성의 입장에서 각각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 쉬블리는 선제공격이 어떻고 하는 잘잘못을 따지지 말자고 강조한다. 지금의 현상을 고슴도치를 삼킨 뱀에 비유했다. 뱀이 너무 절박한 나머지 앞뒤 사정 보지 않고 사막에 어슬렁거리는 고슴도치를 삼켰다. 삼키고 나서 아뿔싸 한다. 고슴도치의 가시가 뱀의 목에 걸려서 내장을 찌른다. 삼키지도, 내뱉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뱀과 고슴도치는 둘 다 서서히 죽어간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학자, 과학자 등 지성인들이 탈 이스라엘을 하고 있다. 산업은 성장을 멈추었다.
끝없는 보복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양측 지도자가 ‘너희는 값을 치를 것’이라는 보도가 화면에 붉은 고딕체로 나온다. 구호물자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목숨으로 값을 지불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은 거대한 죽음의 용광로가 되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원혼이 그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저 어둠이 언제쯤 걷힐까? 나는 검은 연기가 배회하는 화면 속의 하늘을 쳐다본다. 그래도 새벽은 오고야 마는 것 아닌가?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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