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사치와 고요와 흥취의 찰나
내 농사 일지를 들춰보니 시월에는 쪽파와 대파, 배추 모종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십일월 초에는 보리나 유채 씨앗을 뿌릴 때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오일장에 한 차례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는 시간이 빨라져서 오일장도 여름날보다는 훨씬 일찍 파장을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일러주었다. 지난 주말에는 마지막으로 풀을 깎았다. 이제 올해 내에는 더 이상 풀을 깎지 않아도 될 듯했다. 생활 속으로 가을의 계절이 성큼 들어서니 내 생활의 공간도 크게 바뀌는 느낌이 든다.
옆집 사람은 내가 시골에 살면서 늘 부러워하는 분인데, 이 분이 요즘은 연못을 만들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잔뜩 기대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물을 어떻게 가두고, 물을 어떻게 바꿔줄 것이며, 둘레에는 무엇을 두르고, 또 연못 안쪽에는 어떤 생명을 기를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나는 내 협소한 정원에 연못을 들일 엄두를 내지는 못하지만, 골목을 오가며 옆집 연못에서 자라는 것과 연못이 품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될 터이다. 특히 그 수면 위에 하늘이 내려 앉은 것이나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그리고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연못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벌써 설레기까지 한다. 때때로 내 상념도 그 연못의 수면에 비칠 것이니 세계를 비춰볼 거울 같은 것을 하나 더 얻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엔 마을 전체에 정전이 있었다. 옆집을 살펴보고 동네를 둘러보니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마을은 순식간에 정적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에 정전은 복구가 되었지만, 나의 생활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령 이즈음의 내 생활은 국화와 귀뚜라미, 가을의 정원, 마르는 덩굴의 텃밭, 농사의 기록, 곧 생겨날 연못, 거실을 밝히는 빛 등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일 테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 가운데 ‘여행에의 초대’가 있다. 이 시는 배들이 정박해 있는 운하의 석양 풍경을 쓴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데, 시인은 시 도입부에서 “내 아이야, 내 누이야,/ 거기 가서 같이 사는/ 그 즐거움을 이제 꿈꾸어라!/ 느긋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 지고,/ 그리도 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라고 썼다. 그리고 두 행의 시구를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노래했다. 그 시구는 이러하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와 고요, 그리고 쾌락일 뿐.” 화가 앙리 마티스는 보들레르의 이 시구를 그림의 제목으로 삼기도 했는데, 시인이 시에서 거론한 ‘거기’가 뜻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낙원이거나 낯선 여행지이거나 운하이거나 우리가 각자 거주하고 생활하는 곳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내 거주지는 누군가에겐 여행지로 여겨지기도 할 터이므로.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삶이 근거하고 있는 곳에는 질서, 아름다움, 사치, 고요 혹은 적막, 쾌락이 있고 그것을 또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을 예민하게 사용해 계절이 바뀌는 이 시간을 살아도 좋겠다. 오감과 마음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조용히 응시해도 좋겠다. 그곳이 여행지이든 살고 싶은 낙원이든 매일매일 고투하며 견디는 어떤 곳이든 상관없이.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든 우리가 겪을 가을의 시간은 해마다 짧아진다고 하기에.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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