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역성혁명 성공한 삶, 땅 욕심이 화 불렀나
서울 종로구 수진방과 정도전
권력분산 신권국가 지향
신권(臣權)의 나라에선 권력분산이 이루어져서 바람직하긴 해도 조선에서 제대로 작동했는지 판단하기란 힘들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어서다. 임진·병자의 양난을 겪은 후에도 조선은 수혈에 의존한 채 300년을 더 지속했는데 사대부들이 자기들의 강력한 신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큰 이유라고 본다. 조선이 무너지면 이런 특권이 사라지기 때문에 차라리 수혈로 유지되는 나라라도 지속이 되길 바랐다. 지금의 북한 체제가 공산당 엘리트들의 특권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집이 이렇게 컸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가 아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면서 집이 몰수돼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 뒤 지금껏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다. 본채는 국립 중등교육기관인 중학서당이 되었다가 수송초교를 거쳐 지금은 종로구청이 되었다. 안채는 왕실용 옷감 및 의복의 염색과 직조를 담당하는 제용감이 되었다가 불교관리기구인 사사관리서, 대한매일신문 사옥, 중동고, 숙명여고 등이 거쳐서 갔다. 마구간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사복시가 되었다가 해방 후 경찰기마대를 거쳐서 지금은 이마빌딩이 자리한다.
피살 후 ‘수진방’으로 이름 바뀌어
한편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된 데는 정도전이 앞장서 이룬 토지개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을 막상 실행에 옮기려면 정말로 힘든데 이를 과감히 밀어붙인 건 전라도 나주에 천민이 사는 한 부곡으로 유배를 가 이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해서다. 이 토지개혁에 성공함으로써 정도전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아 역성혁명도 꿈꿀 수 있었다. 그런데 역성혁명이 성공한 후 그가 산 집이 궁궐 규모로 컸으니 도저히 토지개혁에 앞장선 사람 같지가 않다. 이런 큰 집을 짓고 유지하려면 수입이 많아야 하는데 그 수입의 대부분이 토지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정도전이란 인물을 평가하는 데 그가 산 집으로 모두를 설명하는 건 분명히 무리다. 그렇지만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데 그들이 남긴 말과 글이 객관적 사료가 되지 못할 때가 왕왕 있다. 말과 글이 그들의 처신과 달라서다. 게다가 역사적 사료조차 승자의 기록인지라 사료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 인물을 평가하는 데 정확한 사료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와야 한다. 의식주가 그러한데 그중에서 주, 더구나 살았던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게 가장 정확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행복은 깃털처럼 가벼운데 누구도 간직할 줄 모르고, 재앙은 땅처럼 무거운데 누구도 떠날 줄 모른다.” 정도전은 땅처럼 무거운 ‘거대담론’을 좋아해서인지 그의 처신도 거창했다. 그래서 역성혁명도 꿈꿀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처신은 고려사회 개혁에는 찬성하나 고려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온건한 개혁주의자 이색과 정몽주와 비교가 된다. 누구의 방식이 옳았는지 여기서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후 성공한 삶에 매몰돼서인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게 사실이다.
80년대 운동권도 반성해야
정도전과 대비되는 사람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하는데, 노태우 정부 때 총리를 지낸 강영훈(姜英勳)도 그중 하나라고 본다. 그는 총리에 임명된 지 1년 만에 사표를 냈는데 이유는 총리로 1년을 재직하다 보니 자신을 향해 칭송하는 소리가 그리 거북하게 들리지 않아서라고 한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는 이런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는 평소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5·16 때는 육사 교장이었는데 5·16을 반대해 강제 예편을 당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거기서 학생 신분으로 공부했는데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이 햄버거 가게에서 시간제로 일했다고 한다.
강영훈은 혁명을 반대했어도 일상에선 혁명가 못지않게 바르게 살았고,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어도 옳은지 그른지를 명확히 판단해 생활세계에서 정의를 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래서 깃털처럼 가벼운 행복을 늘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다. 이점이 혁명해도 그다지 혁명가답지 않게 살아간 정도전과 비교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도전은 머리로 혁명했는지 몰라도 마음으로까지는 혁명하지 못했다고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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