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살 간송미술관의 변신…국보·보물 40건 통째 대구로 옮겼다
오롯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만 놓인 밀실에서 스피커 속 각기 다른 목소리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들려준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화폭만 8m가 넘는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권’(보물)이 11m 길이의 진열장에서 위용을 드러낸다. 혜원 신윤복(1758 ~ ?)의 ‘미인도’(보물)가 놓인 단독 공간에선 신비로운 조명과 향기가 관람객을 18세기 조선으로 불러들인다.
오는 9월 3일 문을 여는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전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12월1일까지)의 풍경이다. 27일 이곳을 미리 찾았을 때 ”마치 올림픽 선수단 입장식 같은 전시”(백인산 간송미술관 부관장)라는 소개대로 간송 컬렉션을 대표하는 유물이 2개 층의 4개 전시실을 채웠다. 간송 측이 소장한 국보·보물 가운데 현실적으로 옮겨올 수 없던 석조물 2건(석탑·승탑)을 제외하고 40건 97점이 모두 한데 모였다. 간송미술관의 역대 전시는 물론이고 웬만한 국립박물관 전시도 뛰어넘는 규모다.
특히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됐던 해례본은 간송 품에 안긴 뒤 6·25 피난을 제외하곤 한번도 서울을 떠난 적 없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귀향’했다. 국보·보물로만 이뤄진 이번 전시의 총 보험가액만 1000억원이 넘는다. 간송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먼 길을 왔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말로 새로운 간송 시대를 여는 소회를 밝혔다.
전 관장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건물 소유권 등 일체 권리와 무관하고 전시만 책임지는 민간위탁운영 관계”라고 소개했다. 운영비도 대구시가 대는 만큼 입장료 수익도 전액 대구시에 귀속된다. “국내에선 처음 시도되는 민관협동 사례로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이 유사 사례”(전 관장)라고 한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기도 한 보화각은 지난 5월 수리·복원을 거쳐 재개관했지만 내부 공간이 협소해 전시 제약이 컸다. 대구 분관은 이와 차별화해 ‘보이는 수리복원실’까지 운영한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학예연구사들이 유물을 보존처리 하는 모습을 관객이 실시간 볼 수 있다. 전 관장은 “대구 분관은 상설전시를 기반으로 친밀하게 경험·향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꾸려가고, 서울 보화각은 제한적이되 특별한 경험을 위한 공간으로 가꿔가겠다”고 했다.
미국 뉴욕대 송예슬 작가와 협업한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 등 디지털 접목이 두드러진다. 제5 전시실은 아예 정선, 김홍도, 신윤복, 이인문 등의 작품으로 실감영상을 제작해 38m 반원형 스크린을 채웠다. 전 관장은 “일종의 쉼터이자 디지털에 더 익숙한 세대가 우리 문화유산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마침 서울 DDP에서도 간송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을 디지털로 재해석한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가 열리고 있다(내년 4월30일까지). 대구에 나들이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전신첩’ ‘관동명승첩’ 등 99점이 몰입형 전시로 소개되고 있다.
전 관장은 “소위 Z세대, 알파 세대는 디지털을 통해 작품을 흥미롭게 접하면 원본까지 관심을 넓히는 경향이 있어 계속 이같은 실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보·보물의 경우 이동과 반출에 제한이 있고 서화류는 장기전시도 힘든데 디지털 콘텐트는 이를 보완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이머시브 K’로 발전해갈 게획”이라고 덧붙였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개관 특별전 후에 전시물을 교체해 일부 상설전시실로 운영하고 타 기관과 협업하는 기획전도 열 예정이다.
강혜란(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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