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귀화 1호 패럴림피언 원유민, IPC 선수위원 도전
뉴질랜드에서 훈련을 하다 25일(현지시간) 파리에 도착한 원유민은 26일부터 2024 파리 패럴림픽 선수촌에서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선수촌에서 만난 원유민은 "캐나다와 한국 국적으로 여름 패럴림픽과 겨울 패럴림픽을 모두 경험했다.선수위원이 된다면 선수 생활에서 느꼈던 것들을 현실로 이뤄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IPC 선수위원은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 때 신설된 자리로 IPC 위원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처럼 장애인 선수를 대표해 체육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한다.
대한장애인체육회의 추천을 받은 원유민은 홍석만(현 한국도핑방지위원회 선수위원장)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4년 임기의 IPC 선수위원 당선을 노린다. 그는 "패럴림픽 선수로서 받은 게 많다. 선수위원이 돼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원유민은 "그동안 동료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뛰고 싶은 마음이 컸다"며 "선수들에게 내 경험을 전달하면서 열심히 뛰겠다고 투표를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1988년 한국에서 태어난 원유민은 4살 때 교통사고로 두 다리와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장애인이 살아가기에 당시 한국은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의 부모는 원유민이 12살이 된 2000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원유민은 "부모님이 날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셨다. 부모님이 많이 고생하셨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 곳에서는 장애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삶은 살아야 했다. 그러나 원유민은 운동을 통해 자아를 발견했고,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캐나다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어울려 생활체육을 즐기고, 엘리트 선수도 될 수 있었다. 원유민은 "휠체어 농구를 시작한 뒤 주변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운동은 날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장애인 선수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운동과 학업을 함께 하면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캐나다 휠체어 농구 국가대표로도 뽑혀 2016 리우 패럴림픽에 캐나다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아쉽게도 그는 평창 패럴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한 선수가 국적을 바꿔서 패럴림픽에 출전하려면 기존 국적으로 출전한 국제대회 이후 3년이 지나거나 이전 국적 국가패럴림픽위원회의 허락이 필요한데, 캐나다 패럴림픽위원회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원유민은 "비록 꿈에 그리던 평창 패럴림픽은 출전하지 못했지만, 한국 귀화 판단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국은 내게 더 많은 기회와 꿈을 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유민은 4년이 지난 2022년 베이징 패럴림픽에 출전해 한국 선수로 패럴림픽 무대를 밟겠다는 꿈을 이뤘다. 그리고 파리에선 IPC 선수위원에 도전하게 됐다. 원칙적으로 선거운동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혼자서 해야 한다.
원유민은 "만약 캐나다에 남았다면 IPC 선수위원에 도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꼭 당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IPC 선수위원 후보는 9월 5일까지 선거 유세 활동을 할 수 있고, 홍보활동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시간과 장소도 정해져 있다. 한국에서 홍보용 명함 2000장을 준비해온 원유민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다시 선수촌으로 들어가 선수들의 두 손을 맞잡았다. 투표 결과는 9월 8일 폐회식에서 공개된다.
김효경(kaypubb@joongang.co.kr)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