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의 청포도 익어가는 고장 어디?…안동·포항 싸움 흥미진진
싸움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흥미진진하다. 저마다 주장에 일리가 있어서다. 안동과 포항이 제 고장의 ‘청포도’를 알리려 애쓰는 모습도 기특하다. 육사가 ‘청포도’를 발표한 1939년은 음력을 쓰던 시절이다. 하여 ‘청포도’에서 ‘7월’은 지금의 8월이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안동과 포항의 ‘청포도 전쟁’ 실황을 중계한다. 이참에 문화 콘텐트를 활용한 지역관광이 활성화하기를 바란다.
포항의 청포도
하여 청년 육사는 한국에 머무를 때 요양을 하거나 자주 여행을 떠났다. 특히 포항과 인연이 두터웠다. 포항에는 집안 형님도 계셨고, 문학을 하는 벗도 여럿 있었다. 1930년대 육사가 포항을 자주 들렀던 건 여러 기록에서 나오는데, 특히 1936년의 포항 여행이 중요하다. 그때 포항의 포도원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바로 이 포도원에서 육사가 ‘청포도’를 떠올렸다고 포항문인협회는 주장한다. 육사가 단순히 포도원을 방문했다는 사실보다 포항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 육사가 부린 문장이다. ‘청포도’ 3연 1행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라는 시구를 보자. 바다가 등장한다. 안동에는 바다가 없지만, 포항에는 있다. 미쯔와 포도원은 바다가 지척이다.
지난 13일. 지금은 해군 골프장으로 활용 중인 옛 포도원 자리를 방문했다. 해군이 골프장 3번 홀을 ‘이육사홀’이라 이름 짓고 3번 홀 어귀에 ‘청포도’ 시비를 세워 기린다는 사실을 포항 시인 윤석홍(68)으로부터 전해 듣고 해군의 취재 협조를 받아냈다. 현장에 나온 골프장 관계자가 “옛날에는 3번 홀이 골프장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다”며 “영일만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 포인트”라고 말했다.
포항의 ‘청포도’ 사랑은 진심이다. 군부대 골프장은 물론이고, 옛 포도원 자리 끄트머리의 동해면사무소 앞에도 ‘청포도’ 시비가 있다. 포항 최고 관광지 호미곶에도 ‘청포도’ 시비를 세웠고, 해군 부대 건너편 일월동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문학공원은 실제 청포도를 키우고, 공원 주변 집 담벼락에 청포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안동의 청포도
이육사는 진성 이씨 집안이다. 퇴계 이황(1501~70)의 14대손이다. 육사가 어릴 적 살았던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지만, 옛 원촌마을 근처에 지금도 진성 이씨 사람이 모여 산다. 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다 가까이에 있다.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했을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에서 연유했다.
육사 집안의 내력을 줄줄이 읊는 이유가 있다. ‘청포도’가 포항 시라는 주장은 일제 강점기 안동에는 청포도가 없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안동과 달리 포항은 일제 강점기 대규모 포도원이 있었으니 ‘청포도’는 포항에서 착상된 게 맞다는 논리다. 포항의 주장에 대해 안동 시인 안상학(62)은 조선 시대 자료와 탐문 취재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육사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육사가 일제 포도원을 갔다가 ‘청포도’를 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라고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동에도 청포도가 있었다. 안동 토박이는 다 기억한다. 옛날 마을 우물가에 청포도 넝쿨이 드리웠던 풍경을. 몇몇 명문가는 집 마당에서 청포도를 길렀다. 그 어릴 적 기억에서 육사 필생의 역작이 잉태했다. 육사의 원촌마을에도 청포도가 있었다는 진성 이씨 사람의 증언도 확보했다. 안동에는 ‘접빈객’ 문화라는 게 있다. 손님이 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오면 귀한 음식을 내놨다. 청포도도 은쟁반에 담아 대접했을 것이다.”
안상학 시인이 포도나무 아래로 가보라고 했다. 포도알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포도나무 그늘에서 고개를 드니 알알이 맺힌 포도알 너머로 바다처럼 푸른 하늘이 비쳤다. 저 하늘이 육사의 하늘이었을까? 그럼 전설은? 안 시인은 “전설은 안동에도 넘쳐난다”고 잘라 말했다.
손민호(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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