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까지 이용 당했다"…김구 첫사랑 내보낸 김일성
〈제4부〉 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
1948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니 한국인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엔은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을 총선거 실시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의 수립, 곧 분단을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어 좌우익 사이에는 적의가 팽배해 있었다.
단정과 분단이 현실로 다가옴으로써 김규식은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남북협상은 명분을 세우기에 좋은 계기가 됐다. 그 무렵 김구도 이승만에 대해 열패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구가 애초에 민족통일을 염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그는 이승만의 정치적 적수가 되지 못하고 끝내 이승만의 단정론에 말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김구의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는 데 유리한 계기가 됐다.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울 주재 소련 대표부를 경유해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희망의 불씨인지, 체념인지 국민의 반응은 착잡했다. 당시 김구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남조선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서울신문 1948년 2월 11~13일)고 선언했다.
김일성의 또 다른 계산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았을 때 상황은 복잡했지만, 김일성의 계산과 결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48년의 상황이 되면 남한의 우익 및 미군정이 단정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이미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성했고, 나름대로 단정 수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이 먼저 단정을 추진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받은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그에게는 밑지는 거래가 아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남쪽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일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한의 제안을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자신이 전혀 새롭게 남북 협상을 제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곧 김일성은 3월 15일에 6개 정당·사회 단체 명의로 남조선의 단정 반대 17개 정당·사회 단체가 4월 초 평양을 방문해 정치협상을 열자고 제안했다. 남한 대표로 김구·조소앙·김규식·홍명희·이극로(李克魯)·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허성택(許成澤, 남로당 중앙위원) 등 15명을 초청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김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48년 초까지도 북한은 김구의 노선을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김구를 ‘김구(金狗)’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애초부터 김구를 주목한 것은 그의 정치적 비중뿐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해 이승만의 단정 의지를 규탄함으로써 자신들의 단정 추진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회의의 일정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김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만약 김구와 그의 일행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그때는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몬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레베데프 비망록』, 1948년 4월 19일) “귀국 후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당황하여 평양에 오려 한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 1980, 262쪽)는 것이 당시 북한 지도자들의 눈에 비친 김구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슈티코프 일기』, 1947년 1월 21일)는 것이 애초부터의 전략이었다.
옛 연인 안신호와 재회한 김구
김구가 북행하던 4월 19일 오전 5시 반쯤부터 경교장(京橋莊)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등 청년 학생 140여 명이 김구의 북행을 만류했으나, 김구는 “이번에 가서 성과가 없다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가르리라”는 말을 남기고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는 아마도 자신이 분단이라는 제단의 순교자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김구는 손수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경교장 뒷문으로 빠져나갔다.(도진순 교수, 창원대) 건강이 나빠 북행할 수 없을 것 같던 김규식은 4월 21일에 병간호할 부인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북행에 올랐다.
안신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김구는 상처를 입었고, 안신호도 상처를 보듬으며 두 남자가 아닌 제3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법인데, 50년 전에 헤어진 여인을 만난 김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북한이 그 여인을 환영객으로 내보낸 것은 김구의 연정(戀情)을 자극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김구가 아무리 심지 굳은 사람이었고 이미 칠순 노인이었다 하더라도, 회의 내내 심란했을 것이다.
4월 19일 저녁 6시,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 연석회의의 막이 올랐다. 회의에는 북측에서 북로당 60명, 민주당 40명 등 15개 정당·단체 대표 300명이 참석했고, 남쪽에서는 남로당 39명, 사회민주당 7명 등 31개 정당·단체 대표 245명이 참석했다. 전체 참가자는 695명이었다. 통일을 논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김규식은 몸이 아파 오전 회의에는 나가지 못했다가 이튿날부터 참석했다. 김규식의 북행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몸으로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북행한 그는 자리를 채워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의를 하다가도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독립운동가 장건상(張建相)의 회고담] 참가자들이 일제 시대에 옥살이한 햇수를 모두 합치면 746년9개월이라는 점을 보고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성향을 부각했다. 남한 대표의 자격으로 등단한 김구는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쟁취”(조선일보 1948년 4월 24일)라고 호소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용당한 김구”
4월 25일에는 김일성광장에서 환영 군중 집회를 열었는데 동원된 인원은 30만 명 정도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요인 회담을 요청했다. 김구·김규식, 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은 4월 29일과 30일 두 차례 열렸다. 김구·김규식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김두봉에게 남한에 대한 전력 공급과 송신 재개, 남한의 연백(延白)평야에 대한 농업용수 송수, 조만식(曺晩植)의 월남 허용, 중국 여순(旅順)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해 이장 등을 요구했다. 조만식의 월남은 되지도 않을 요구였다.
그런데 북한은 평양 회담 당시에 김구가 김일성에게 정치적 망명을 타진했다고 선전했다. 곧 김구는 미국인들이 자신을 탄압한다면 이북에서 정치적 피난처를 구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1985년 8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 보도] 그리고 김구는 “지난날의 죄과를 털어놓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과수원을 차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일성은 “김 선생(김구)이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어려우면 다시 북조선에 들어오시라 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 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우리에게는 그저 인민 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거절했다는 주장이다(『김일성 저작집』(4), 1979, 303~304쪽).
이 대목은 매우 미묘해 주의가 필요하다. 김구가 평양에 갈 때 직인을 가져갔으나 그것은 남북한의 합의가 이뤄지면 권위 있게 날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김일성에게 ‘헌상(獻上)’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수원 문제는 망명한다거나 구걸의 뜻이 아니라 김구가 자기 고향도 이북(해주)인데 노후에는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 과수원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를 과장해 극화했다.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인에게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이제 돌아보면 김구의 북행은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다.
[참고문헌]
김일성, 『민족 대단결을 위하여』(평양:로동당출판사,1996)
『김일성 저작집(4)』 (평양:조선노동당출판사,1979)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장건상편』(민음사,1988)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돌베개,1997)
『레베데프 비망록』 1948. 4. 19.
서울신문, 1948.2.11~13.
『슈티코프일기』 mimeo.
이완범, ‘김구, 남북협상, 대한민국 수립’,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심포지움(2015.4.23)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국토통일원,1980)
조선일보.1948.4.24.;1948.5.7.
신복룡(simon@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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