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고혈압 유발 사회
현대 생리학의 새로운 발견인 ‘알로스타시스(Allostasis)’는 ‘몸에서 뭔가 필요할 때 충족할 수 있도록 자동으로 예측하고 대비하는 생체적응’을 뜻한다. 알로스타시스 개념의 주창자이자 뇌신경 생물학자인 피터 스털링에 따르면, 빈민 지역의 고혈압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정상’ 반응이다. 사회적, 경제적 고립 속에 인종차별, 가족 붕괴, 실직 등이 겹쳐지면 스트레스에 취약한 집단은 필연적으로 고혈압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럴 때는 고혈압은 정치적 어젠다가 된다. 질환의 배경에 사회경제학적 요인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 발표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질환 통계에 따르면 국내 고혈압 환자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고혈압 환자 수는 746만7000명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고혈압 진료 현황에 따르면 654만2000여 명이었던 2019년에 비해 14%가 늘어났다. 그에 따른 진료비도 약 1조3000억원으로 약 24% 늘어났다. 눈여겨볼 대목은 국가 경제의 중추인 20대에서 40대의 증가율이 가장 크다는 점이다. 경쟁과 생존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혈압은 혈관 노화를 촉진하는 방아쇠인 이상지질혈증을 동반하기 쉽다.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에서 공개한 2022년도 이상지질혈증 팩트시트에 따르면, 고혈압 유병자의 72.1%는 이상지질혈증을 앓고 있었다. 고혈압으로 인한 혈관이 손상되면 그 부위에 콜레스테롤이 더 쉽게 쌓이면서 혈관이 좁아지는 죽상동맥경화증에 가속도가 붙는다. 고혈압이 불러온 합병증은 무겁고 가혹하다.
알로스타시스 개념은 사회적 요인을 건강문제의 본질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망률과 질병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직업적 위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의학적 연구결과는 차고 넘친다.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재정적 불안정, 여유 없는 일상, 노동강도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생존율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상식적 질서가 왜 국민 건강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이유인지를 말해준다.
고혈압이 사회적 환경이나 교육, 소득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국가가 소득 불평등이나 교육 양극화 등 사회문제를 고민할 때 질환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만성화된 국민적 질병 치료를 위해 사회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지금처럼 사회적 스트레스를 단지 한 개인의 정서 관리의 문제로 국한할 게 아니라 국가적 문제로서 인식 전환을 하는 일이 시급하다.
생존경쟁에 내몰린 청년과 중장년층, 아픈 마음들의 시대에 정치는 역할이 유실되었고 복지는 장밋빛 선언으로만 흩뿌려진다. 고혈압 환자가 광폭으로 늘어간다는 사실을 사회적 현상으로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국민 건강은 거듭난다. 경제적·교육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의 보편적 안전망 구축을 고민해야 할 우리 사회가 의대 정원 문제로 수개월째 의료 공백을 빚으며 국민의 혈압을 오르게 하는 일은 상식적이라 할 수 없다. 규모만 지나치게 커진 의사 수는 부실의 양면성 속에 보편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돌아봐야 한다. 혈맥의 폭에 비해 혈액이 넘친다면 혈압은 높아져 위험한 상태가 된다. 혈맥에 불순물이 잔뜩 끼어 정순하지 못하다면 같은 양의 혈액이어도 고혈압이 된다. 사회에 의해 유발된 고혈압은 그래서 정치적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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