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하의 시시각각] ‘자동거부권’이라도 도입하자
비슷한 이유로 요즘 한국 정치엔 자동거부권 제도가 필요한 것 같다. 현 국회 상황은 이렇다. ①민주당이 논쟁적 법안을 본회의 상정→②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저지→③민주당이 필리버스터 종결안을 제출해 24시간 뒤 강제 종결→④민주당 본회의 단독 표결→⑤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⑥국회 재의결(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필요) 실패→다시 ①부터 되풀이. 이른바 ‘바보들의 행진’으로 불리는 정쟁의 무한 루프에 갇혀 있다.
어차피 노란봉투법·방송 4법 등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법안은 대통령의 거부권이란 예정된 결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야구처럼 국회도 ①에서 곧바로 ⑥으로 가면 어떠냐는 것이다. 즉 국회 본회의에 문제의 법안이 올라오면 대통령이 국회의장에게 해당 법안에 대한 거부권 의사를 통지한다. 그러면 그 법안은 본회의에서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고, 의결하는 즉시 법안의 효력이 발생토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회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의원들은 의미 없는 필리버스터로 시간·체력 낭비를 할 필요가 없으며, 깔끔하게 표결만 하면 되니 소모적 충돌과 악다구니도 줄어든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야당이 논쟁적 법안을 강행처리 했을 때 야당 집권 시 해당 법안의 효력을 발생케 하는 ‘조건부 거부권’ 제도는 어떨까. 가령 민주당이 지난 5일 강행 처리한 ‘노란봉투법’은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됐던 법안이다. 그때 민주당은 절대다수 의석이었고 집권당이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노동부가 “법률 원칙을 흔드는 조항이 많다”고 제동을 거는 바람에 단념한 법안이다. 그런데 만약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 당장은 거부권을 행사하지만, 나중에 민주당이 집권하면 자동으로 노란봉투법이 발효되도록 하겠다”며 조건부 거부권을 선언할 수 있다면? 민주당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무모한 입법을 함부로 추진할 수 있을까.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한다는 양곡관리법도 마찬가지다. 쌀값이 폭락하면 정부가 초과량을 의무적으로 사들여 쌀값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 주겠단 것인데, 이런 식이면 사과관리법ㆍ감자관리법은 왜 안 만드나. 이 법도 문재인 정부 시절 발의됐지만, 정부가 “쌀의 공급과잉을 부추길 수 있다”고 반대해 불발됐다. 지금 민주당은 대통령을 골탕 먹이기 위한 용도로 양곡관리법을 밀어붙이지만 만약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 해당 법안이 자동 시행된다고 해보라. 민주당에서도 경제를 아는 의원이라면 분명히 입법을 망설일 것이다.
아마 자동거부권이나 조건부 거부권은 위헌 시비에 휘말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국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런 비상수단이라도 강구해야 한다는 한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어리석은 ‘바보들의 행진’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김정하(wormh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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