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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잊혀버린 소중한 순간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특별한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 순간은 때때로 삶의 회전판 위에서 소비되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희미한 듯 선명하게 작은 햇살을 띄워준다. 나에게도 그러한 소중한 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세상이 어둡게만 느껴질 때 그늘진 마음을 이내 밝혀 주었던 작은 빛과 같았다.  
 
오래전 이사를 했었는데 사방으로 울타리가 여러 가지 다른 나무로 되어있었다. 옆집과 칸막이가 되어 우리 식구만 즐길 수 있는 공간 뒤뜰이 너무 좋았다. 울타리 밑으로 잡풀이 나고 지저분해서 풀들을 뽑았다. 그때는 포이즌 아이비도 몰랐고 포이즌 아이비 풀도 몰랐다. 며칠이 지나고 손, 팔뚝, 다리 할 것 없이 노출된 부분이 가렵고 불긋불긋 두드러기가 돋아나더니 가렵고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박박 긁고 나면 잿물도 나고 보기에도 흉했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어찌할 바도 모르고 있는데 손님이 내 팔뚝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가게에서 나갔다. 10분 후에 다시 왔다. 손에서 선 테인 로션 같은 것을 주면서 가려운 곳에 바르라고 한다. 너무 고마웠다. 모르는 손님인데 치료 약을 주다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빼앗다시피 받아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려운 곳에 발랐다. 이게 웬일인가 금세 가려움이 멈추면서 빨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보며 의자에 주저앉아 무슨 약인지 그때야 보였다. Hydrocortisone lotion USP. 포이즌 아이비가 얼마나 지독한 세포 반응을 일으키는지 약을 바르면 좀 수그러들다 약 효과가 떨어지면 또 가려워서 견딜 수 없는 얄궂은 알레르기 병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허더라도 그때 그 순간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선명한 빛깔로 남아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는 늘 평온하고 충만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샘솟음을 느낀다. 한 번만 더 우리 가게를 찾아오면 보고 싶었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질도 변하는 모양이다. 올해는 햇볕이나 날씨가 90도가 넘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솟아나 가렵고 따가워서 견디기 힘들다. 포이즌 아이비는 아닌데 증상이 똑같다. 우연히 그 약이 생각났다. 서랍을 뒤졌는데 그 약병이 보였다. 유효 기간이 2010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약이 조금 남아 있었다. 뚜껑을 열어 가려운데 살짝 발랐더니 가려운 기가 없어졌다.  
 
그 약을 사려고 약국에 갔다. 약병을 보이며 똑같은 약을 사려고 약사에게 다가갔다. 약사는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가게로 돌아왔다. 그 약병을 가지고 딸에게 처방전을 부탁했다. 펄쩍 뛰듯이 그 약은 처방할 수 없단다.  
 
코티손이라서 바르면 안 된다고 했다. 매일 바르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기가 나와 가려우면 바를 테니 처방해 달라고 했으나 못 해준다며 방문을 닫아 버렸다. 무척 서운했다. 딸이라고 애원했는데 퇴짜를 맞다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또 햇볕을 받고 걸었더니 팔꿈치 접히는 안쪽 팔뚝에 두드러기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가려웠다. 집에 와서 화장실에 있는 서랍을 뒤져보니 캄비손 연고가 보였다. 유효기간이 지났다. 그래도 조금 발랐더니 가려움과 통증이 멎었다. 캄비손 연고를 팔뚝에 바르면서 그 손님의 온정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일상에서 잠시 잊혀버린 순간 일지라도 소중한 경험이 내게 커다란 울림과 단단한 힘이 되어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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