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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가 보여주는 ‘통상시대’의 남양 풍경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9>]

김기협 역사학자
동남아 해양부(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무슬림 인구 거주지역이고 대륙부에도 무슬림 인구 비율이 상당하다. 그래서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동남아 진출을 기독교권의 이슬람권 압박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인이 나타날 때까지 이슬람화가 확고한 지역은 동남아에 많지 않았다. 동남아가 14세기 이후 (앤서리 리드가 말하는) ‘통상(通商)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슬람의 확산이 주요 항로를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까지도 남양에 이슬람이 자리 잡은 곳은 많지 않았고, 그런 곳에서도 지역사회의 이슬람화는 그리 철저하지 않았다. 이슬람도 하나의 외래종교로서 남양의 전통문화와 복잡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남양의 이슬람화는 16세기 이전보다 그 이후에 주로 진행되었다.

말라카는 언제 술탄국이 되었나?
〈말레이연대기 Sejarah Melayu〉에는 1402년의 말라카(멜라카) 창설자 이름이 이슬람식인 ‘이스칸달 샤(Iskandar Shah)’로 되어 있다. 토메 피레스의 〈동방대전 Suma Oriental〉에는 힌두식 ‘파라메솨라(Parameswara)’로 되어 있다. 중국 〈명 실록(實錄)〉에 나오는 ‘배리미소랄(拜里迷蘇剌)’은 ‘파라메솨라’의 음역이다.



〈말레이연대기〉는 이슬람국가 말레이의 전통을 현양하는 문서이므로 이슬람화 이전의 이름까지 소급해서 이슬람화한 것으로 보인다. 〈용비어천가〉에 이성계의 조상이 목조, 익조 등 시호(諡號)로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다. 파라메솨라(1344-1414)는 당대의 중국 기록자와 백년 후의 포르투갈인 기록자 모두 그 이름을 ‘파라메솨라’로 알고 있었다.

피레스의 기록에는 그 아들 메갓 이스칸달 샤(Megat Iskandar Shah, 재위 1414-1424)도 힌두식 이름 ‘차켐 다락사(Chaquem Daraxa)’로 나타난다. ‘술탄’의 호칭을 취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414년 이후로 봐야 하겠다. 파라메솨라 자신이 죽기 전에 개종했다고 하는 〈말레이연대기〉의 기록은 이슬람 전통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말라카에는 네 개 외국인 구역이 있고 각 구역의 교역 업무와 치안을 아울러 담당하는 샤반달(Shahbandar)이 있었다. 네 개 구역은 각각 구자라티(인도 서해안), 켈림(인도 동해안과 벵골만 일대), 자바인, 중국인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다양성을 포용하던 이 시대 집중교역항(entrepot)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관세 제도다. 통상적 관세인 10%보다 낮은 6%의 관세를 서쪽에서(구자라티와 켈림) 오는 화물에 매기고 동쪽에서 오는 화물은 면세로 받아들였다. 어느 쪽에서 오는 화물에나 군주 등에 대한 ‘선물’은 따랐는데, 1~2% 수준으로 추정된다. 남양의 천연 상품과 중국 공산품의 수요가 특별히 컸기 때문에 관세 부담을 면제한 것으로 보인다.

집중교역항의 발달을 위한 자연조건과 인문조건
말라카는 통상시대 집중교역항의 발달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해협 요충지라는 위치를 말라카 발전의 근거로 흔히 말하지만, 말라카해협은 한반도보다 더 긴 약 800킬로미터 길이다. 이 넓은 지역에 항구로서 자연조건이 말라카보다 못하지 않은 곳은 한둘이 아니다.

자연조건에 인문조건이 겹쳐져 말라카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통상시대에 접어들며 특별한 집중교역항의 발달이 필요하게 된 상황부터 살펴본다.


통상시대 이전의 교역에서는 장거리교역의 비중이 작았다. 대부분 교역이 좁은 지역 내에서 작은 배로 이뤄졌기 때문에 고만고만한 항구들이 도처에 발생했다. 조그만 강어귀에 자리 잡은 항구마을이 강 상류의 농경지대와 네게리(negeri)의 공생관계 속에 존재했다.

장거리교역이 늘어나며 통상시대에 접어들자 몇몇 항구들이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큰 배가 닿을 수 있고 식량과 자재(선박 수리를 위한 목재 등)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단계에서 항구의 성공을 위한 기본조건이었다.

기본조건을 갖춘 항구들 사이의 경쟁에서는 제도적 조건이 관건이 되었다. 선박과 선원, 상인들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하고, 다음번 기항 때도 같은 조건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을 주어야 했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집중교역항이 자리 잡으면 화물이 모두 그곳에 모이고 인근의 다른 항구들은 종속적 위치로 떨어지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파라메솨라가 팔렘방(스리비자야)과 싱가푸라를 거쳐 말라카에 왔다고 하는 전설의 행간에서 이 경쟁의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스리비자야는 앞선 시기에 방대한 해역을 주름잡은 해양세력이었고 후에 싱가포르가 될 싱가푸라는 말라카해협 남단의 요충지였다. 말라카의 발전 뒤에는 스리비자야와 싱가푸라의 경험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전진기지 확보를 위한 명나라의 기획
정화 함대는 첫 항해 때 말라카를 전진기지로 삼는 데 큰 공을 들였다. 나가 보니까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서 그냥 골라잡은 것이 아니었다. 사전 작업이 있었다.

함대가 준비 중이던 1405년에 환관 윤경(尹慶)이 말라카에 사신으로 나간 기록이 있다. 중국은 새로 세워진 나라와 조공관계를 쉽게 맺지 않았다. 남양 국가가 조공관계를 원할 때는 과거의 조공 기록이 있는 나라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파라메솨라가 스리비자야 후예를 자처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영락제가 사신을 보내게 된 경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명나라 함대의 전진기지로서 말라카의 적합성을 확인하고 함대 파견의 준비 작업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말라카 쪽에서 함대 유치를 위해 홍보활동을 벌였을 수도 있고, 동료 환관을 보내도록 정화가 황제에게 건의했을 수도 있다.

명나라의 ‘간택’ 덕분에 말라카는 해협의 중심 항구가 되었다. 중국 상품의 원활한 공급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명나라는 샴 등 인근 강대국의 위협을 억제해 주기도 했다. 팔렘방 ‘해적’ 진조의(陳祖義) 평정도 말라카의 주도권 보장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와 안보를 모두 명나라에 의지하는 입장에서 말라카는 극진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라메솨라가 1411년 정화를 따라 영락제를 알현할 때 수행한 인원이 540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에 한 차례 더 갔고, 그 아들도 두 차례 갔다. 15년 기간(1411-1425년)에 조공국 군주가 네 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것은 중국외교사에 희귀한 일이다.

알라우딘 리아얏 샤(재위 1477-1488) 때 말라카 풍경을 상상한 그림. 말라카 거주 인구는 전성기에도 수천 명 선이고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중국에 간 대규모 사절단에는 외국 상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명 실록〉에 메갓 이스칸달 샤의 이름이 “母幹撒于的兒沙”란 음역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죽기 전에 술탄이 되어 ‘샤’의 칭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는 영락제가 죽고 명나라의 남양 진출 사업이 수그러지면서 말라카는 명나라의 직접 보호를 벗어나 이슬람 항구도시로서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해양제국’ 스리비자야의 정체는?
재닛 아부-루고드는 〈유럽 패권 이전 Before European Hegemony〉(1989)에서 말라카 등 집중교역항의 성격에 관한 흥미로운 생각을 내놓았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체제’의 중심부는 생산력에서 앞서가는 곳이고 교역로 일대는 생산력이 뒤진 주변부인데, 세계체제가 불안할 때 주변부가 부각되면서 집중교역항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이다.

스리비자야를 예로 든다. 7-11세기 중국 기록에 ‘삼불제(三佛齊)’란 이름으로 많이 나타나 대단히 번창한 국가로 보이다가 12세기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마자파힛 등 자바 세력에 밀려난 것으로 흔히 해석하는데, 아부-루고드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래 큰 세력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는 상업조직일 뿐이었는데, 12세기 이후 중국 선박의 남양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그 역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관점의 가장 참신한 점은 ‘국가’의 역할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학자 아닌 사회학자라서 쉽게 취할 수 있는 관점이었을 것 같다. (이 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기본적 사실에 착오가 많아서 일반 독자는 읽기 어렵겠다. 가르침을 많이 얻은 책의 약점을 들추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이 책은 좀 심하다.) 역사학자는 국가에 대한 강박을 벗어나기 힘들고 기록 속에서 뭔가 활기찬 현상을 보면 국가의 존재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해양제국’ 스리비자야의 존재는 그간의 고고학 연구로도 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크고작은 교역세력들이 중국 시장 진출을 원활히 하기 위해 연합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아부-루고드의 관점은 최근의 여러 연구성과와 잘 맞는다. ‘삼불제’의 이름이 중국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15세기 초 정화 함대의 출동 때 그 일대의 ‘해적’들도 말라카를 세운 파라메솨라도 같은 연원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 분야 연구가 근년에 얼마나 빨리 진행되어 왔는지 새삼 놀랍다. 아부-루고드의 책은 차우두리의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1985)과 함께 이미 ‘고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두 책이 나온 이후 남양사 연구의 수준과 방향은 종래와 크게 달라졌다.

김기협(orun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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