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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 외교, 거품부터 빼야 강해진다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주 북한을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유사시 상호 군사지원키로 하는 조항을 담은 조약을 체결한 것은 한국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북한에 이어 베트남을 방문한 사실도 한국외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푸틴에게 값진 외교적 활로를 제공함으로써 베트남-러사아 관계에서 ‘채권자’가 됐다. 또 외교적 독자성을 견지하면서 지정학적 몸값을 올림으로써 미국이 베트남에 대해 더 강하게 ‘구애’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와 옛 소련 시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응 웬 푸쫑 당서기 등 옛 소련에서 유학한 지도급 인물들이 많고 베트남 수입 무기의 60~70%가 러시아산이다. 베트남 전쟁 때도 옛 소련의 군사 지원을 크게 받았으며, 중국의 잠재적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남아 국가 중에서 러시아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대나무 외교로 실리 찾는 베트남

한반도평화워치
베트남은 최상급 외교관계인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7개 나라와 체결했다. 체결 순서는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 미국, 일본, 호주다. 순서만 놓고 보면 같은 사회주의권, 비동맹권 국가들을 시작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가군으로 확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베트남은 자국과 중요한 이해관계에 있는 다양한 나라들과 역사나 이념·체제에 관계없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유연성을 보이는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당한 역사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적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냉철한 사고에서 나왔다.



실리와 국익을 최우선으로
베트남식 실용외교 참고할 만
과도한 포퓰리즘 경계하고
한·일 문제 초당적 대응해야
또 베트남은 심화하는 미·중 대결 속에서 자국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안보 위협을 최소화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추구해오고 있다.

우리와 지리적, 역사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가진 베트남이 수천 년 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지정학적 저주’를 ‘지정학적 축복’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은 천 년 넘게 중국의 지배와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미국과도 전쟁을 치렀지만 표면적으로는 강한 반중·반미 분위기를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나 지난해부터 베트남은 일본을 제치고 우리의 제3의 교역 상대국이 되었고,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 된 지 오래다. 베트남이 미국·일본보다 한국과 먼저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은 사실에서도 경제적 실리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국익을 추구해 나가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유연성 결여된 한국 외교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20일 응 웬 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물론 한국은 베트남과 체제·이념, 지정학적 위치가 다르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와 같은 유연성을 가진 외교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이 역사적 응어리가 있는 중국, 미국, 한국, 일본(2차대전 시 지배), 호주 (베트남전 참전) 등 중요 국가들과 민족주의적, 감정적 대응을 극력 억제하고 일관되게 실질적 관계를 발전시켜가고 있는 점은 크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체제·이념, 과거사 등을 둘러싼 정파적 분열이 상당한 정도로 한국의 외교를 소모해 온 사실에 비춰 보면 베트남식 실용외교에서 배울 점이 적지 않다.

한·일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한동안 경색됐던 한·일관계가 지난해부터 회복되었음에도 체감할만한 가시적 관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국내에 존재한다. “한국이 물잔의 반을 채웠는데 일본이 그 반을 채우지 않고 있다”는 시각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고, 한국 사법부가 한일협정에 반하는 징용자 배상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은 한국에 있으며, 현 정부가 결단하여 이를 바로 잡았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도 어려운 결정을 통해 과거사에 더는 구속되지 말고 미래의 협력을 추구한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한·일 정부 모두 미래에 방점을 두는데, 우리 국민은 현 정부의 과거사 해결 방식을 선뜻 지지하지 않고 있어 정치적으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국가관계의 본질은 경쟁과 협력

한·일관계 개선이 당장 국민이 체감하는 수준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장차 정치, 안보, 경제, 문화, 인적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는 토대가 강화됨에 따라 우리 국익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국가 간 관계의 본질은 경쟁과 협력이다. 이제 일본은 우리의 ‘경쟁자’이지 우리의 ‘적’이 아니다. 한국은 이웃한 선진국 일본에서 배우고 경쟁하면서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서려고 노력해 왔으며 이것이 우리 경제발전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일본과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되었고 특히 제조업에서 일본을 앞서는 분야가 많다. 한국이 강해질수록, 한·일관계가 안정될수록 일본과 경쟁하는 분야 못지 않게 협력할 분야도 많아져서 더욱 긴밀한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나는 한·일 간에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해도 양국 각계의 협력과 교류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최소화되는 관행이 정착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일 파트너십을 미래지향적으로 꾸준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뿐 아니라 정치의 책임도 매우 크다. 한·일 문제를 두고 초당적 대응을 바라는 건 순진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국 간 건설적 교류와 협력까지 손상할 수 있는 과도한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여야 모두 유념해야 한다. 당리당략적으로 반일감정을 선동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국익을 해치는 행위다.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다. 지나친 기대보다는 어렵게 회복된 한·일관계를 새 시대에 걸맞는 방향으로 지속가능하게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는 자세로 양국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기 바란다. 지난달 4년여 만에 열린 서울의 한·일·중 정상회의를 통해 한·일은 중국과의 외교적 접점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앞으로 중국은 한·미·일 간 안보·경제·이념적 연대를 약화하기 위해 한·일·중 정상회의를 한·미·일 정상회의와 같은 위치로 격상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총리 참석의 관행을 깨고 한·일·중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려 할 가능성 등 다양한 시도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도전과 시련이 가중되고 있는 한국 외교에서 무용하고 비생산적인 거품을 빼야 할 시기가 왔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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