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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의 시선] 한·러 관계, 위기 관리에 나설 때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한국과 러시아가 서로를 향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포문을 열었다. 푸틴은 지난 19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어느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면 지체 없이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 조약으로 양국 동맹 관계를 28년 만에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푸틴은 지난 5일 세계 통신사들과의 만남에선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하지 않아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했었다. 푸틴이 한국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낸 지 2주 만에 북한과 사실상 동맹 관계를 복원하며 한국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꼴이 됐다.

북·러 조약 이후 한·러 거친 설전
레드라인 넘으면 양국 모두 손해
냉정 되찾고 신뢰 회복 나서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관련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한국 정부가 지난 20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재검토’라는 초강수를 두자, 푸틴은 바로 “살상 무기를 우크라이나 전투 구역에 보내는 것과 관련, 이는 아주 큰 실수가 될 것”이라며 “북한에 대한 초정밀 무기 공급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통령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3일 “러시아가 고도의 정밀 무기를 북한에 준다고 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선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무기를 제공할 경우 한국 정부도 제한 없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장 실장은 그러면서도 “러 측이 하기 나름”이라며 러시아의 행동에 달렸다는 뜻을 밝혔다. 앞서 푸틴도 이번 조약이 1961년 맺은 조·소(북한·소련) 조약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며 한국이 북한을 침공할 리 없으니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도 없을 것이란 취지로 말했다.

한·러의 강성 발언으로 양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한국은 러시아의 대북 첨단무기 기술 제공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살상 무기 지원을 ‘넘으면 안 되는 선’으로 여긴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고,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 군사 기술을 이전하는 건 한·러 모두에 손해다. 상대방에 대한 강성 조치는 보복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양국이 상대국에 강하게 경고하면서도 상황을 관리하려고 애쓰는 이유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락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됐다″라면서 ″김정은 동지께서 푸틴 동지와 함께 조약에 서명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뉴스1
한국이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우방국들의 강한 요청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 살상 무기 제공을 하지 않은 것은 한·러 관계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가 악화하며 한·러 관계도 냉랭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가기 힘들게 된다. 이는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한반도 평화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 고립을 자초했고, 북한 등 일부 독재국가에서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푸틴의 새 북·러 조약 체결이 한국에 충격을 줬지만, 실제로 북·러 관계가 바뀌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 출신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침략받았을 때 상호 지원을 규정한 새 북·러 조약은 한반도 상황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푸틴의 방북은 요란한 사건이었지만 남북한 역사에서 각주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침략받았을 때 상호 지원을 규정한 새 북·러 조약은 한반도 상황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푸틴의 방북은 요란한 사건이었지만 남북한 역사에서 각주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뉴스1
윤석열 정부 들어 지난 2년여 동안 대외 정책이 한·미·일 협력에 쏠리며 북·중·러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게 사실이다. 한국의 생존을 위해 한·미·일 협력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해 북·중·러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윤 정부는 서로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일·EU 등과의 가치 외교에 치중하느라, 지리적 이웃인 중·러와는 거리를 둬왔다. 그 결과 한국의 외교 입지는 크게 줄었다. 한·미·일 협력과 중·러와의 관계 개선을 함께 도모하는 외교 정책이 한국의 국익에 바람직하다.

한·러가 서로 공개 경고장을 날리는 상황에서 당장은 관계 복원이 어려울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거친 경고가 양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다면 이제는 한발 물러나 냉정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국가 간에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외교의 기술이다. 그래야 위기를 관리하며 관계 회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양국의 신뢰 구축에 주력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접점을 넓혀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재홍(hong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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