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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의선 105층 포기한 결정타

‘미래 모빌리티 도전’ 정의선 리더십 뿌리
경제+
창업자의 길과 후계자의 길은 다르다. ‘미친 짓’으로 세상에 없던 길을 만드는 게 창업자라면, 후계자는 수성(守城)하는 동시에 새로운 길도 개척해야 한다. 수많은 기업들이 ‘100년 기업’을 말하지만, 창업자 못지 않은 후계자를 키워낸 기업만이 이룰 수 있는 꿈이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그 길을 준비하고 있다. 할아버지 정주영 선대회장의 도전정신을 손자 정의선은 새롭게 계승해 현대차그룹을 모빌리티 혁신의 중심에 세우는 중이다. 글로벌 3위 완성차 그룹을 이끄는 정의선 리더십의 뿌리를 살펴본다.
“할아버지라면 어떤 선택?”…이말 되물으며 사업 구상
“할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경영자로서 고민이 생길 때마다 묻는 질문이다.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과거 참모들에게 같은 물음으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최근 설계 변경으로 화제가 된 서울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인 GBC(글로벌 비즈니스 콤플렉스)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그는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결정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 고(故) 정주영 선대회장의 도전정신은 그 자체로 현대차그룹의 핵심 헤리티지(유산)이기 때문이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시작으로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선대회장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기회를 만들어낸 기업가였다. 1971년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영국에 가 1억 달러의 차관을 따냈고, 조선소도 없이 그리스에서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해낸 이가 정주영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2022년 고려대 졸업식 축사에서 “제가 고려대에 진학할 때 할아버지께서 ‘내가 고려대를 지었다’(본관 공사 참여 경험)고 자랑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어떤 실수보다도 치명적인 실수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당부를 사회로 나서는 후배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 89학번이다.



그가 회장 승진 후 먼저 챙긴 것도 현대차의 도전 기록을 찾고 기억하는 일이었다. 2023년 5월 이탈리아 레이크 코모에서 공개된 ‘포니 쿠페’ 복원 프로젝트는 그런 정 회장의 의지가 드러난 대표 사례다. 미국 포드의 자동차를 국내에서 라이센싱 생산하던 현대차는 독자 모델 개발을 목표로 이탈리아에 전담 팀을 보내 디자인·설계·기술을 연구했다.

그렇게 나온 스포츠카 콘셉트(시제품 격)의 포니 쿠페는 혁신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 공개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차 오일 쇼크(1979년)와 경기 침체 등으로 대량 생산되지 못했고, 설계도도 사라졌었다. 정 회장은 복원된 포니 쿠페를 공개하며 “정주영 선대회장님과 정세영 회장님, 정몽구 명예회장님,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충구 사장님도 계셨고…”라며 할아버지 참모들의 기여를 잊지 않고 챙겼다.

신사업 추진 ‘디테일’ 강조…‘물불 가리는’ 선택적 도전
박경민 기자
포니 개발 주역인 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은 “내가 정 회장에게 ‘현대차의 헤리티지를 되살려 줘서 고맙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 회장에 대해 “신중하고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스타일이고, 내가 회사 떠날 때도 가장 먼저 전화를 해준 사람이 정의선 회장이었다”라고 말했다. 손자 정의선은 할아버지 정주영의 포니 쿠페를 미래차로 다시 만드는 중이다. 현대차는 포니 쿠페의 디자인을 계승한 고성능 수소차 ‘N 비전 74’를 준비 중이다.

정 회장은 지인들에게 “우리 파운더(founder, 설립자 정주영)는 그 시대의 일론 머스크”라고 말하곤 한다. 자동차 산업 100년의 역사를 뒤흔들고 경쟁의 무대를 전기차로 옮긴 머스크는 화성 탐사 우주선도 개발 중이다. 그런 라이벌 머스크에게서, 백사장에 조선소를 세우고 비포장도로에 국산 모델 자동차를 굴리려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포니
그러나 그 파운더의 길과 자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정 회장은 잘 안다. 정 회장을 오래 지켜본 한 기업인은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자네, 해봤어?’로 사람들을 휘어잡고 밀어붙여서 일하는 경영자였다면, 정 회장은 참모들의 의견을 차분히 듣고 ‘그럼 해보죠’라며 사람들을 이끌고 해야할 일을 따박따박 하는 리더다.”

정 회장은 할아버지의 도전 정신을 ‘해보죠’로 계승하고 있다. ‘패스트 팔로워’를 넘어 자동차 산업의 변곡점에 선 현대차그룹엔 머뭇거리는 참모들에게 ‘해보자’ ‘해보라’고 길을 열어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CEO의 경험이나 물불 가리지 않는 도전 자체보다도, 조직 내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융합하는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룹 안팎에선 정 회장이 기존 사업의 개선방안, 미래 사업에 대한 제안 등을 쭉 들어본 뒤 “해보죠”라는 말로 독려한다는 일화가 많다. 현대차그룹이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로봇, AAM(미래항공모빌리티) 등 미래 모빌리티 전반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수소에너지 생태계까지 폭넓게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배경이다.

정 회장은 올해 3월 뉴욕 모터쇼를 앞두고 공개된 제네시스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네오룬의 콘셉트카를 사전에 보고받았을 때도 그랬다. 차량 앞 좌석과 뒷좌석의 가운데 놓인 차체 옆 기둥 ‘B필러’가 사라진 네오룬의 디자인을 접한 정 회장의 반응은 “해보죠. 이런 챌린지(도전)를 멈추지 맙시다”였다.

초고층보다 초혁신 중요…신사옥 구상 과감히 바꿔
‘포니 쿠페’ 복원 프로젝트
전기차와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소프트웨어 기반 차량(SDV) 시대의 경쟁에서도 정 회장의 판단은 ‘해보죠’다. 김동진 전 현대차 총괄부회장은 “2000년대 토요타의 하이브리드차량 프리우스가 ‘대박’을 내는 걸 본 이후 그룹 내 위기감이 컸는데, 정 회장은 그때부터 이미 전기차와 SDV 분야에서 우위를 확보해 역전을 노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부회장이던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SDV에 본인과 회사의 미래를 걸었다. 기계공학 전공자 중심의 자동차 제조사지만 전공·출신을 불문하고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로선 ‘스마트카’라는 말이 주로 쓰일 때였다. 전자·정보기술 기업들이 주축인 소비자가전박람회(CES)에 현대차·기아가 2009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것도 정 회장의 의지였다. 그러면서 본인이 영입한 소프트웨어 전공 임직원들에게 일관되게 주문했다.

“이 정도로 고객이 만족하겠습니까. 교통체증 때도 자동차가 알아서 움직이는 그런 기술 만들어보세요. 한번 해보죠.”(2015년 3월, ‘혼잡구간 주행지원 시스템’ 공개 행사에서)

한국의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집념의 정주영 선대회장, 품질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뚝심의 정몽구 명예회장을 거쳐 정의선 회장의 미래 모빌리티 도전은 현대차그룹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 특히 정 회장의 ‘해보죠’는 올해 입사 30주년을 맞은 그가 거친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 키워드이자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보는 렌즈다. 세계가 주목하는 ‘정의선 리더십’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정의선 연구〉 시리즈는 매주 월요일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된다.




최선욱.윤성민.고석현(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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