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로 가는 길

호수로 가는 길
 
 
[신호철]

[신호철]

호수로 가려면 / 남기는 기대일랑 져버려야 하지 / 무거움 버리고 가벼워질 때 / 흔들리는 모든 건 순리가 되지 / 조건이 많을수록 바람 드세고 / 드센 바람 맞을수록 걸음은 무뎌질 테니 / 손 베일 칼을 쥐어선 안되겠지 / 무턱대고 다가섰단 통째 / 그를 잃게 되기도 하지 / 떠나보내기도 하겠지 // 호수로 가려면 / 속삭이는 사랑이 되어야 하지 / 관계가 힘들 땐 사랑을 택하고 /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 서로의 등이 짐이 된다면 / 소리 없는 균열이 시작 되겠지만 / 그에게 다가서는 길을 걸어야 하지 / 마음의 거리는 무관심과 비례하니 / 거리를 좁히고 얼굴 앞까지 가서 / 그의 숨소리로 숨을 쉬고, 잠 들고 / 그의 눈에 내 눈을 포개야 하지 // 사랑을 하려면 / 손 내밀어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 혹여 뿌리치는 그 물결 감싸 쥐어야지 / 냉랭했든 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 거리를 좁혀 한나절 흐르다 보면 어느새 / 우리 사이 어우르는 물길이 되고 / 끊이지 않는 물소리 노래가 되리 // 등과 등 사이 깊은 골은 사라지고 / 서로를 바라보다 사랑에 빠지게 되지 / 물길도 깊고 내 마음도 깊어 마침내 / 마음의 거리는 한 길 되지 / 언제라도 달려가면 넓은 가슴 / 속삭이는 사랑이 되지 //
 
[신호철]

[신호철]

 
호수로 향하는 길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마음이 가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호수가 보이는 비밀의 정원을 걷게 된다. 호수로 가는 길은 고요하고 적막한 들 길이다. 누가 가꾸지도 않은 좁고 아득한 길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내 안에 가득 채워지는 행복의 시간들. 호수에 가는 내내 기특하고 신기한 들꽃들을 만나게 된다. 노랗고 보랏빛이 나는 들꽃과, 하얗고 별 모양을 한 작은 꽃들을 보면서 세상을 지으시고 참 좋았더라 하셨던 조물주의 마음이 전해 온다. 조금 후 펼쳐질 호수의 풍경만큼이나 가슴 벅찬 풍경이다.
 


겨울 내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황량한 빈 들에 꽃들이 피어나고 바람에 쏠리는 들풀들의 유희는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장관이다. 하늘이 너무 파래 구름이 흐르는 모습이 꼭 푸른 물 위를 흐르는 작은 돛단배 같이 보인다. 들풀이 한쪽으로 밀리는 걸 보니 호수가 가까이에 있다는 징후다. 휘어진 길 끝엔 자그마한 모래 언덕이 있고, 이제 몇 그루의 나무를 지나면 푸른 호수 그 잔잔한 물결 앞에 소개된다. 호수가 내게 달려온다. 나는 두 팔을 벌려 호수를 안는다.  
 
왜 자주 찾아오지 못했을까? 이곳에 올 때마다 호수처럼 마음이 파랗게 물든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아 겨울에도 눈길을 헤치며 호수와 마주했었다. 자세히 보면 호수는 늘 푸르지 않다. 어떤 날은 짙은 프러시안 블루였다가 코발트의 청량한 블루가 되기도 한다. 한 날은 어디가 호수의 끝인지 어디가 하늘의 시작인지 모르게 호수와 하늘은 한색이 되기도 한다. 호수는 하늘 위에서 구름을 그리고, 하늘은 호수 아래 물결과 놀기도 한다. 호수도 인생처럼 늘 잔잔하고 평화스럽지만은 않다. 바람이 몹시 심하고 추운 날 점퍼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호수를 찾은 적이 있었다. 눈길에 푹푹 빠지며 호수 앞에 섰는데 호수는 화가 나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의 폭이 내 키를 넘는 듯했다. 온통 회색빛의 호수와, 호수를 누르고 있는 하늘과, 나를 날려 보낼 것 같은 살을 에이는 찬 바람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몸을 움추리고 서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호수는 만날 때마다 무언의 말을 남겨 주었다. 삶은 그런 거라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펑펑 울고, 사랑하려면 뜨겁게 사랑하라고. 결코 물러서지 말라고, 한 걸음도 뒤로 주춤하지 말라고….
 
이곳에 오면 많은 일들이 생각나기도 지워지기도 한다. 꾸밈없는 이 호수가 좋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호수가 믿음직하다, 지난겨울도 올 봄도 오늘도 변함없는 호수의 손짓은 그리운 이의 손짓만 같다.
 
떠내려온 나무 등걸에 앉아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물결을 바라 보다 보면 삶은 어느덧 밀려 오고 빠져 나가는 호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깨우쳐지는, 세상 소리는 사라지고 물결이 밀려 오고 부서지고 또 빠져나가는 동안 선명하게 남겨지는 파도 소리며, 그 적막함이며, 모래알 구르는 소리만 가득하다. 오른쪽 해변으로부터 멀리 왼쪽 해변까지 걸으며 남겨진 외로움을 생각해 본다. 얼마나 더 살아가게 될지. 우리 앞에 펼쳐질 희로애락의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느리게 살아 가고 싶다. 젊은 날 시카고에 와 이제 불혹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걸음을 아껴야겠다. 두 걸음을 한 걸음으로 줄이며 살아야겠다. 아침이 깨어나는 시간을 느끼며 아침의 고요를 셈하며 살아야겠다. 호수의 깊은 푸르름이 나의 남은 삶의 푸르름으로 이어진다면 호수로 가는 길은 이때껏 걸어왔던 길 중 나의 최애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시인, 화가)
 

신호철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