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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심심한 고향 청주 닮은 심심한 미학의 단색화

단색화 거장 윤형근과 청주
김인혜 미술사가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윤형근(1928~2007)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1991년 미국 미니멀아트의 거장 도널드 저드(1928~1994)를 서울에서 만났는데, 이때 이들의 대화가 재미있어 신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저드가 물었다.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윤형근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느릿한 충청도 말투로 대답했다. “예술은 심심한 거여.”

배석했던 통역자가 ‘심심하다’는 말을 저드에게 설명하느라 고전했다. ‘심심하다’는 시간적 의미로 말하면 ‘지루하다’는 뜻이다. 똑같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면, 우린 심심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무런 목적도 없고, 규정된 틀도 없이 ‘심심한’ 순간이 있어야 예술적 창의가 일어난다. 예술은 특별하게 힘을 줘서 잘난 체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에 심심하게 스며들어 듬직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윤형근은 생각했다.

“예술은 심심한 것” 특유의 지론
잘난 체 않는 듬직한 미감 추구

죽은 지 수백 년 된 전나무에 충격
“나도, 그림도 대수롭지 않아” 각성

대학 졸업에 10년, 쉰에 활동 시작
묵은 발효음식 같은 작품 쏟아내



또한, ‘심심하다’를 맛으로 설명하면, 마치 우리의 전통 제사 음식 같은 것이 된다. 간을 하긴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려 담백한 음식 말이다. 그런 음식을 담아 올린 우리의 백자 제기 같은 것도 참 심심하다. 허연 무채색으로 얼핏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자꾸 봐도 질리지 않는 심심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 심심한 미학이야말로 윤형근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지점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환기 장녀 김영숙과 결혼

1977~78년작 ‘청다색’. 개인소장. 윤형근은 이 작품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도 했다. 하늘을 뜻하는 파란색과 땅을 뜻하는 갈색을 섞은 검정에 가까운 색으로 문(門)을 그려서다. 핵심은 오히려 가운데 여백의 공간, 즉 문 너머의 세계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아니나 다를까. 윤형근은 심심한 도시 청주 태생이다. 충청북도 ‘청주’하면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무색무취의 도시, 대전만큼이나 ‘노잼’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냥 노잼 도시가 아니라, 노잼으로 유명해지려면, 재미없음의 차원이 상당히 높아야 한다. 핫한 곳도 없고, 트렌드도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하고, 느리고 심심하게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 고장이 청주라면, 청주는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매력적인 곳인지도 모르겠다.

윤형근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찾아서,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356번지를 가 봤다. 그는 파평 윤씨 장손 집안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파평 윤씨는 16대에 걸쳐 미원면 어암리에서 살아왔는데, 윤형근의 부친 대에 미원리로 나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홍송(紅松)을 가져와 공들여 지은 한옥이었지만, 현재는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다. 다만, 남서쪽에서 볕을 담뿍 받는 집의 배치는 옛 그대로인 듯 보였다.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과 집 옆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윤형근의 생가 바로 뒤편으로 현재 ‘미동산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다.

윤형근의 부인은 화가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이었는데, 처음 결혼해서 시댁에 와보고, ‘내가 참 시집을 잘 왔구나’ 생각했단다. 도무지 부잣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옆 개울에 다슬기가 많이 잡혔던 데다, 산들이 새까맣게 보일 만큼 나무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부인이 다슬기국을 좋아해서, 윤형근이 새벽마다 나가서 다슬기를 잔뜩 잡아 오곤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현재도 청주의 특산 별미 중 하나가 다슬기국이다.

풍림정사 지은 박문호의 4대손

1986~87년작 ‘다색’. 개인소장. 땅에서 솟아오른 기둥 같은 형상이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윤형근의 집안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그의 할아버지 동산 윤태현은 유학자였다. 조선 말 충청도 지역의 거유(巨儒), 호산 박문호(1846~1918)의 제자이자 손자사위였다. 박문호는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의 절친으로, 이름난 문장가이자 유학자였다. 일찍이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여소학(女小學)』을 집필했고, 논어·대학 등 유교 경전에 대한 방대한 해설서를 남겼다.

1988~89년작 ‘다색’. 개인소장. 오랜 세월 흙이 덮이고 덮여 만들어진 무덤 같은 형상이다. 삶과 죽음, 시간에 대해 일깨운다.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박문호가 제자를 가르친 곳이 충북 보은의 풍림정사(楓林精舍)였다. 미원면에서 고개를 몇 개 넘으면 닿는 곳. 지금은 32번 지방도와 25번 국도가 놓인 그 길을 차를 타고 지나는데,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즈넉한 산길이었다. 풍림정사는 또 어떤가. 100년 넘는 시간이 그곳에서만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던 듯, 뒷동산 소나무를 등지고, 울창한 은행나무 한 그루를 앞세운 작은 학당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박문호의 손자사위였던 윤형근의 조부도 이곳에서 공부했으리라. 박문호의 손녀가 윤형근의 할머니였으니, 윤형근은 박문호의 4대손이다. 이런 연유로 윤형근의 집에는 박문호의 저작 『호산집』 전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민병산과 청주 으능나무

미원면 생가 앞에서 찍은 1940년대 가족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윤형근. [사진 윤성렬, PKM 갤러리]
풍림정사 앞 은행나무도 오랜 시간을 버텼겠지만, 청주 중앙공원의 은행나무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 윤형근의 친구였던 철학자 민병산(1928~1988)은 같은 청주 출신인데, 누군가 청주에 볼 만한 게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청주에는 별달리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그저 하나 볼 만한 게 있다면, 중앙공원에 있는 으능나무이다.” 청주에서는 은행나무를 ‘으능나무’라고 불렀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 공민왕 때 이미 고목이 되었다고. 공민왕 때는 700년 전이니, 이 나무는 1000년 가까이 살았다고 봐야 할 터.

보은 풍림정사. [사진 국가유산청]
민병산이야말로 청주의 자랑이다. 그가 중앙공원 은행나무를 잘 아는 것은 원래 이 주변 일대가 대부분 민병산 집안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으능나무 그늘에서 자랐다. 충청북도에서 제일가는 부호 집안이었지만,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후, 자신은 거의 거지처럼 지냈다. 그의 별명이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였다. 보성고보 재학 때 독서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독서·번역·글쓰기·바둑·서예 등으로 대략 연명하며 살아가다가 60세에 타계했다. 얼핏 평생 놀고먹은 사람 같이 보이지만, 그가 남긴 저작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그는 동서양의 철학을 독파한 후 이를 아작아작 씹어 자기 것으로 만든 위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긴바라 세이고 같은 일본 미학자의 책을 번역해 한국 미술계의 담론 형성에도 기여했다.

청주의 또 다른 걸물인 시인이자 출판인, 침술가였던 신동문(1927~1993)과 더불어, 민병산과 윤형근은 삼총사였다. 6·25 전쟁 때 이래저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모두 고향 청주에 내려와 있던 시절, 이들은 현재의 충북문화관 맞은편에 있던 윤형근의 집을 아지트 삼아 늘 모여 지냈다. 이 집은 윤형근의 조부가 지은 작은 별채였는데, 어느 날 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민병산이 트럭 한가득 꽃을 실어와 그 집 마당에 심더란다. 자기 집에 있던 꽃을 왜 이리 옮겨 심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매일 이곳에서 지내니, 꽃도 이리로 옮겨 와 매일 보려고 한다”라고 답했다. 곧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주의 많은 학생이 이 집에 숨어들어와 지냈다.

윤형근의 장구한 시간 개념

청주시 중앙 공원의 은행나무. 고려 공양왕 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목은 이색을 홍수로부터 구해주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진 국가유산청]
민병산은 1000년 은행나무를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크다’든가 ‘세월’이라든가 하는 몇 가지 귀중한 관념이 그와 같이 뚜렷하게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한 가지 행복이다.” 민병산에게 은행나무가 깨달음을 줬다면, 윤형근에게는 전나무가 그랬다. 윤형근은 1970년대 어느 날 강원도 오대산 원시림에서 죽은 지 수백 년 지나 뿌리가 흙으로 변해가는 거대한 전나무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견디는 나무의 오랜 세월을 생각하면, 100년도 못사는 인간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 심지어 거목(巨木)마저 영원할 수는 없다.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라고 윤형근은 썼다.

그런 장구한 시간 개념이 윤형근의 삶과 작품에 녹아있다. 그는 느릿하게 살았다. 이유야 어떻든 대학을 졸업하는 데만 10년 걸렸고, 작품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도 그의 나이 거의 50에 가까워서였다. 그러나 그는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오래 묵혀 제대로 맛을 내는 발효 음식 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서까래처럼 거무칙칙하고, 돌처럼 우툴두툴한데, 자연스럽고 듬직하게 우뚝 선 그런 작품이었다. 윤형근의 시간은 참 느릿하게 흘렀지만, 그래서 심심한 맛을 표현하는 법을 제대로 익혔다.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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