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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녹즙기

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녹즙기에 푸른 케일을 넣는다. 녹즙기는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처럼 케일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한다. 숨이 활발해지자 몸의 한쪽에 초록빛 진액을 받아 소중히 품는가 싶더니, 다른 한쪽에는 상반된 표정으로 물기 없이 뻣뻣한 줄기를 심드렁하게 뱉어낸다. 푸른 섬유소와 진액을 깔끔하게 분리하는 녹즙기, 과거와 현재를 완벽히 갈라놓는 냉정한 세월을 닮은 것 같다.
 
녹즙기 터널을 지나 둥글게 돌아가는 모터를 통과한 케일의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지고 부서지다 마침내 짓이겨지기까지 한다. 힘든 케일의 수행과정은 세포 속에 숨겨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존재 이유가 될 알맹이가 깨지기 전까지 이어진다.
 
우리 삶도 겉모양보다는 내면에 품고 있는 알맹이가 중요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선 때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조차 감수해야만 하리라. 삶의 진액만을 취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네 짧은 생과, 알맹이인 즙만을 추출해 간직하는 녹즙기는 그런 면에서 닮았다.  
 
녹즙기는 입을 통해 들어간 내용물을 교활하게 왜곡시키지 않는다. 깊게 헤아려 보면 자신의 가슴에 어떤 삶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네 삶의 모습과도 같은 듯싶다.
 


 녹즙기 내부를 분리해 물로 씻으며 찬찬히 살핀다. 모터 깊숙한 곳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당근 한 조각이 눈에 띈다. 한때는 몸의 한 축을 이루던 그것이 아니었던가. 주황색 당근에는 한낮의 뜨거운 열정과 새벽이슬의 인내와 별의 꿈들이 숨 쉬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때가 되자 그것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어, 자기의 자리를 비워내고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가며 하잘것없는 쓰레기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문득 당근 한 조각에서 내 삶을 반추해 본다. 나도 때가 되면 무엇인가를 위해 몸을 낮추며 삶의 진액을 다 뽑아내는 무저항의 헌신을 할 수 있을까.
 
 잠시 후 녹즙기가 지어낸 한잔의 싱싱하고 푸른 엽록소의 세포들을 들이켠다. 잔을 비우자, 초록빛 엽록소가 싱그러운 햇살처럼 온몸의 세포로 마구 퍼지는 것 같다. 초록빛 기운이 전신에 파릇파릇 솟아나는가 보다. 몸이 새털같이 가벼워지고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몸 안으로 들어간 푸른 엽록체들이 육신과 영혼에서 활발한 탄소동화작용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내 영혼에 푸른 잎들이 마구 솟아나 아름다운 녹음방초(綠陰芳草)를 이루어, 힘들고 지친 삶에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 더불어 사는 이웃의 생에 시원한 그늘과 풍요로운 여유와 평화로운 휴식을 가져다주었으면 한다.  
 
 녹즙의 효능은 해독 작용이 있어, 섭취하면 독소가 정화되고 피가 맑아지며 체내에 염증을 없애 준다고 하지 않던가. 내 영혼에 들어간 삶의 녹즙도 혼탁한 세상을 정화해 맑게 하고, 곪아가는 세상의 염증을 다스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아침 잘 갈아진 녹즙 한 잔으로 새삼 삶의 의미를 배운다.

김영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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