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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의 문화난장] ‘로코’ 무대 선 장애, 극복하지 않아도 충분해

이지영 논설위원
장애가 인간 승리의 조건도, 인식 개선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저 실재하는 삶의 조건 중 하나였을 뿐. 지난 28일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린 연극 ‘젤리피쉬’는 장애인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한 작품이지만, 장애 서사의 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 부모의 보호를 떠나 자립하려는 자녀의 보편적 성장 서사를 그려냈다.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의 관객 평점 9.8점. 총 5회 공연의 전 좌석이 매진됐다. 장애인의 연애와 결혼·임신 등 흥행 코드에서 벗어난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서 이례적인 반응이다. 제작사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의 석재원 프로듀서를 만나 제작 뒷얘기를 들었다. 그는 연극 ‘튜링머신’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비 Bea’ 등 화제작을 만들어온 제작자다.

다운증후군 주연 ‘젤리피쉬’
대사 암기 돕는 프롬프터 배우 등
‘불굴의 노력’ 대신 맞춤 시스템
전 좌석 매진에 관객 평점 9.8
‘젤리피쉬’ 켈리 역의 다운증후군 배우 백지윤(오른쪽).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우리 없이 우리 얘기 할 수 없다”

석 프로듀서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해외 언론의 리뷰를 통해서다. 영국 극작가 벤 웨더릴의 2018년 초연작 ‘젤리피쉬’는 그동안 영국과 호주 무대에 올랐다.

극작가 웨더릴은 무대 예술에서 ‘과소 대표’ 되어온 발달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다운증후군인 켈리는 비장애인 닐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켈리의 엄마 아그네스는 딸이 닐에게 ‘착취’당할까 두려워 반대에 나선다. 하지만 이어진 켈리의 임신 소식. 낙태를 권하는 아그네스는 딸과 또한번 대립한다. 무거울 법한 시놉시스지만, 가디언과 더 타임스 등 영국 매체들은 이 작품을 “로맨틱 코미디”라고 했다. 대본을 구해 읽어본 석 프로듀서도 극의 ‘재미’에 매료됐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찾아가 공동 제작을 제안했고, 지난해 4월 제작 결정이 내려졌다.



주인공 켈리 역은 영국과 호주 공연에서 모두 다운증후군 배우가 연기했다. 장애인 역할을 장애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최근 세계 콘텐트 업계에서 드러나는 트렌드다. 극 중 청각 장애인 역을 모두 청각 장애 배우가 맡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코다’가 대표 사례다. 유색 인종 역할을 백인이 분장으로 꾸며 연기하는 ‘블랙페이스’ ‘옐로우페이스’가 백인에 의해 설정되고 조종되는 방식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사라진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젤리피쉬’ 공연에 맞춰 방한한 극작가 웨더릴도 이와 관련, “우리 없이 우리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장애인들의 주장을 전했다. 넉 달여의 캐스팅 과정을 거쳐 다운증후군 무용수 출신 백지윤 배우가 켈리 역에 확정됐다.

다운증후군은 인지장애와 학습장애를 동반한다. 이를 극복하라며 다운증후군 배우에게 불굴의 노력을 강요하는 대신 장애 특성에 맞춘 제작 시스템을 만들었다. ‘창작조력자’와 ‘프롬프터 배우’다.

24일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의 석재원 프로듀서(왼쪽)


연습 때마다 체크인·체크아웃

석 프로듀서와 민새롬 연출 등 제작진 모두 장애인 배우와 작업해본 경험이 없었다. 발달장애인 공연팀과 함께 활동했던 안무가 고권금이 창작 조력자로 제작진에 합류했다. 장애 배우에게 나타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역할이 그에게 맡겨졌다.

백지윤 배우는 낯선 상황에 대한 경계심이 컸다. 극 중 상황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영국 공연의 켈리 역 배우에게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습 때마다 10여 분씩 모든 창작진이 ‘이름 부르기’ 게임과 ‘짝 산책’, 스트레칭 등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체크인’ ‘체크아웃’이란 새로운 절차도 도입했다. 연습 시작 전 자신의 근황이나 기분을 이야기하는 ‘체크인’을 하고, 연습 마무리는 그날의 소감을 밝히는 ‘체크아웃’으로 하는 것이다. 작품 속 가상 세계와 일상 현실을 구별 짓기 위한 장치였다.

대사 암기도 완벽할 순 없었다. 영국 공연에서 사용한 인이어는 소리 자극에 예민한 백지윤 배우에게 맞지 않았다. 대신 무대 아래에서 대사를 상기시켜주는 ‘프롬프터 배우’와 보조를 맞추게 했다.

이 모든 시도는 장애 배우를 위한 복지 성격의 배려가 아니었다. 예술성 제고를 위한 아이디어였고, 효과는 컸다. 당사자성을 확보한 장애 캐릭터 연기는 비장애인 배우의 흉내 내기 연기와 차원이 달랐다. 과장 없는 담백한 장애 연기가 극이 신파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젤리피쉬’는 무대 안팎의 묵직한 생각거리가 달달한 ‘로코’ 속에서 꿈틀거리는 작품이다. 겉으론 말랑말랑해 보이지만 강력한 침이 있는 해파리(jellyfish)를 닮았다. 관객 호응에 힘입어 내년 상반기엔 장기 공연을 할 계획이다.





이지영(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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