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삶의 향기]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

황주리 화가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 요즘 본 영화제목이다. 원제목은 ‘I’ll see you in my dreams’다. 얼마 전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자리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그리움이라는 잊힌 감성을 소환해 본 뜻깊은 시간이었다. ‘미당’의 시에 곡을 붙이기도 한, 고 황병기 선생의 배우자이신 소설가 한말숙 선생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꿈이라는 걸 평생 꾸지 않는 남편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서정주 선생과 신라의 달밤 길을 하염없이 거닐었다고 하셨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애창곡이 ‘신라의 달밤’이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코끝이 찡해졌다.

아버지,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다. 살면서 점점 옅어지는 그리움, 이럴 때 시간이 약이라기보다는 쓸쓸함이 앞선다. 그리움의 소환이 아버지의 추억을 불러냈다. 때는 1987년, 뉴욕 사는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와 낯선 나라 모로코를 여행하던 중, 버스를 타고 캄캄한 밤길을 하염없이 달리는데 영국인 가이드가 동양인인 아버지께 정중하게 노래를 한 곡 부탁했다.

살면서 그리움도 점점 옅어져
현재는 과거 세대 희생의 결과
다큐·글 등으로 잊지 않고 간직

[그림=황주리]
전등불도 달도 없는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리며 한국어로 부르는 ‘신라의 달밤’에 버스에 동행한 미국인들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앵콜 박수를 받으며 원래 노래를 잘하시는 아버지가 ‘성불사의 밤’을 한 곡 더부르셨다. 다음 날 날이 밝아 서로 통성명하면서 우리는 여행 온 미국인 중 반 정도가 은퇴한 한국 참전 용사라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때였다. 그로부터 37년이 흘렀다. 이제는 꿈속에서도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다. 며칠 전 백남준 선생의 예술과 생애를 담은 다큐 영화,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다가 60년대의 젊은 전위예술가 백남준이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예술가라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에 눈물이 났다. 유명세가 있어도 그는 넉넉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작품을 팔아도 재료인 TV값이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대는 다음 세대의 희생물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텔레비전커녕 핸드폰만 있어도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볼 수 있는 이 꿈 같은 세상에 살며 우리는 더는 꿈을 꿀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꿈을 자주 꾸는 나조차 꿈을 꿔 본지 오래된 기분이다. 영화를 자주 보는 이유는 메말라가는 내 그리움을 지금 여기 소환하기 위함이다. 나이 들수록 사람들은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접는다. 자식이 남보다 못하기 일쑤고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개나 고양이에게 정 주다가, 그들이 세상 떠나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기도 한다. 시간은 ‘뻥’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시간은 계속 뻥튀기면서 소녀를 노인으로 만든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시인의 이 기막힌 시 구절을 외우던 시절을 지나 거울 앞에 선 지도 오래다. 거울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늙어 갈 뿐이라고 침묵으로 답한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 하는 얼굴로 늘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오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가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듣는 척 할 뿐, 듣고 있지조차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걸 아는 데 참 오래 걸렸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멀어져가는 우리 중에서 배신감을 느끼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늘 변함없이 듣는 척하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떠들어대는 쪽이었으니까. 나는 또 하나 그리움을 접는다. 며칠 전 나의 네 번째 소설이 출간되었다. 그림 그리는 사이사이 틈틈이 쓴 결과물이다. 백세시대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한 우물을 파라고 설교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공든 탑은 다 한 우물에서 나온 거다. 육십 년 이상 화가인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너무 말이 없는 딸을 걱정한 어머니를 따라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게 내가 화가가 된 이유다, 소설가가 꿈이던 어머니와 그 시절 잘 나가던 출판사 대표인 아버지의 합작품인 내 유전자는 사실 미술보다 문학에 가깝다. 며칠 전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꿈에 네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구나. 그래서 내가 왜 미술상이 아닌 문학상을 탔냐고 막 서운해했어.”

그래서 내가 막 웃으며 말했다. “뭘 타든 서울만 가면 되지.”

내게 그림이 밥 먹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이다. 어머니는 또 말씀하신다. “책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에 책 만드는 사람도 책 읽는 사람도 다 귀인이야. 고마운 일이지.” 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황주리 화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