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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여성도 재산 상속에서 동등한 권리, 이혼·재혼 자유로워

남성 못지 않았던 고려 여성의 지위
이익주 역사학자
‘원님 재판’이란 말이 있다. 고을 수령이 자기 맘대로 하는 재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수령이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는 격이니 그런 말이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근대 사법 체계가 자리 잡기 전에는 수령이 모든 걸 다 하게 돼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법 없이 맘대로 판결한 것은 아니었다. 솔로몬의 재판에 어디 판사며 검사며 변호사가 따로 있었는가. 고려에도 솔로몬의 재판처럼 감동적인 사례가 있다.

남매 상속 분쟁 끝낸 손변의 판결

손변(孫抃·?~1251)은 고려 무신 집권 시절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다. 그가 경상도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 어떤 남매가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였다. 남동생이 “한 어머니에게서 났는데 어찌 누이만 부모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내게는 나눠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따졌다. 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재산을 모두 내게 주셨고 네게는 검은 옷 한 벌과 검은 관(冠) 하나, 미투리 한 켤레, 두루마리 종이 한 묶음만 주셨다. 문계(文契·증빙서류)가 갖춰져 있는데 어찌 어겼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딸·아들 똑같은 금액 상속 일반적
장자상속은 19세기 조선 때 확립
재혼 자유롭고 여성도 제사 모셔
딸 이혼시켜 왕비로 들인 경우도

조선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인 조반(趙胖·1341~1401)의 부인 초상화. 고려시대 초상화가 거의 없다 보니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그뿐 아니라 고려시대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송사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자 손변이 두 사람을 불렀다. 손변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손변이 둘에게 “아버지가 임종할 때 어머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먼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손변이 “그때 너희들은 몇 살이었느냐”라고 묻자 누이는 이미 결혼했고,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손변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 대해 똑같은 것이니 어찌 나이 먹고 혼인한 딸에게만 후하고 어미도 없이 어린 아들에게는 박했겠는가. 어린 아들이 의지할 데라곤 누이뿐인데 만일 유산을 똑같이 나눠주면 누이가 동생을 아끼는 것이 지극하지 않고 양육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을까 걱정이 됐을 것이다. 아들이 장차 커서 이 두루마리에 소장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를 신고 관청에 와서 고하면 장차 판결해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이 네 가지 물건만 남긴 뜻은 이와 같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매는 깨달은 바가 있어 서로 마주 보며 울었고, 손변은 재산을 반씩 나눠 주었다(『고려사』 손변 열전).

조선 중기 율곡 7남매도 재산 균분

1669년에 작성된 김명렬 전후문기(傳後文記). 앞으로 제사를 종가에서만 지내도록 하고, 딸에게 재산의 3분의 1만 물려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자녀 균분 상속의 전통이 깨지기 시작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인이 된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린 손변의 지혜가 눈길을 끌지만,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마지막 문장에 숨어 있다. 두 사람에게 ‘재산을 반씩 나눠 주었다’는 것은 재산 상속에서 균분(均分)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옛날에 적장자(嫡長子), 즉 적자 중에서 장남이 유산을 단독으로 상속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이 남매의 사례에서 보듯이 시집간 딸도 재산 상속에서 아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자녀 균분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례를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속 관행은 조선으로 이어져 『경국대전』에서도 부모의 토지와 노비를 자녀가 똑같이 나눈다고 규정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사례가 있다.

율곡 이이의 형제자매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면서 작성한 문서가 지금 남아 있는데, 율곡을 비롯한 4남 3녀가 거의 정확하게 균분했다. 노비의 경우 장남이 16구(口), 장녀가 16구, 차남이 16구, 차녀가 15구, 3남(율곡)이 15구, 3녀가 15구, 4남이 15구를 가졌다. 이 숫자 배열 16·16·16·15·15·15·15는 재산 상속에서 균분과 동시에 연장자 우선 원칙이 적용됐음을 보여준다.

1729년에 작성된 임욱 화회문기(和會文記). 장남에게 차남보다 2배 많은 재산을 상속하고 딸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와 조선시대의 주요 재산인 토지와 노비를 똑같이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지에는 비옥한 토지와 척박한 토지가 섞여 있고, 노비도 젊고 힘센 노비, 늙거나 어린 노비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면적을 똑같이 나누거나 노비 수를 똑같이 한다고 해서 균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또 노비 수는 상속인 수로 나눠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나눴을까.

집주(執籌)라고 해서 제비뽑기를 했다(이종서, ‘조선전기 균분의식과 ‘집주’’, 2004). 노비는 늙은 노비, 젊은 노비, 어린 노비 등 세 그룹으로 나눠 이름을 써놓고 형제자매가 나이 순으로 각 그룹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이었다. 토지도 비옥도에 따라 나누고 이렇게 했다. 그러면 얼추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었고, 간혹 다소 불만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불운으로 돌리면 될 일이었다. 율곡의 형제자매 중에 넷째 이하에게는 16회 차의 제비뽑기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자신이 손아래인 걸 어쩌겠는가.

이이 남매 화회문기. 1566년(명종 21)에 율곡 이이의 7남매가 상속 재산을 똑같이 나누기로 합의하고 작성한 문서. [사진 문화재청]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적장자 단독 상속은 근거가 없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어느 때부터 자녀 균분 상속이 아들·딸 차별을 거쳐 장남 단독 상속으로 바뀌어 갔다. 1669년 어떤 집안의 분재기(分財記, 재산을 나누는 문서)에는 딸에게 아들의 3분의 1만 주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1729년의 어느 고문서에는 2남 1녀 중 딸의 상속분이 전무하고 장남이 차남보다 더 많이 상속한 사실이 나온다. 1818년에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경국대전』의 균분 상속 조항을 비판하면서 승중자(承重子, 제사를 잇는 아들), 즉 적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아들과 딸에게 나눠 상속하면 재산이 쪼개져 결국 가문의 뿌리가 약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 후기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명문가도 몰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현이었다.

19세기 이후 자리 잡은 적장자 단독 상속 관행은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도 위력을 떨쳤다. 1960년 개정 이전의 민법에 따르면 상속권은 오로지 장남에게만 있었고, 차남 이하와 딸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 뒤로 법이 여러 번 개정돼 지금은 부모 재산을 아들·딸이 똑같이 나누게 됐지만, 그 이전 200년간의 전통이 마치 우리 역사 전체의 것인 양 잘못 알려진 것이다.

남편보다 재산 많은 아내 발언권 더 세

다시 고려로 돌아가 보자. 아들과 딸이 부모 재산을 똑같이 물려받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선, 가정에서 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딸도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던 만큼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지낼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부모가 아들에게만 의존하지 않아도 됐고, 딸을 차별할 이유도 없었다. 결혼해서도 남편과의 지위가 대등했다. 여성이 결혼 전부터 자기 재산을 갖고 있거나 결혼 후에도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부부의 재산은 따로 관리됐다. 불행이 찾아와 부인이 먼저 죽으면, 부인의 재산은 남편 몫이 되지 않고 자녀들에게 상속되거나 친정으로 되돌려질 정도로 보호를 받았다. 남편보다 재산이 많은 부인도 있을 수 있었고, 이 경우 집안에서 누구 목소리가 더 컸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딸이 부모를 봉양한다면 굳이 아들과 함께 살 필요도 없었다. 젊은 남녀가 결혼해서 남자 집 또는 여자 집에 들어가 살거나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은 각자의 처지에서 선택할 문제였고, 실제로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놀랍게도 남자의 처가살이가 고려의 오랜 전통이었다.

여성의 재산 소유는 이혼과 재혼에도 영향을 줬다. 이혼해도 생활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결혼한 여성이 친정 부모와 함께 살았으므로 남편이 처가에서 자기 짐을 빼는 것으로 이혼이 완료됐다. 자녀의 양육권은 그때그때 합의했겠지만, 어머니가 맡아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이혼이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재혼 역시 금지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의 재혼이 금지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여성의 재혼도 조선 초에 금지되기 전까지는 자유로웠다.

고려 후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권형이라는 사람은 딸이 전신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사위의 집안이 변변치 못한 것이 불만이어서 이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왕에게 아뢰어 딸을 이혼시키고 왕비로 들였다. 아버지가 딸을 이혼시키고, 그 딸이 재혼을 하필 국왕과 했던 이 사례는 고려시대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금기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선보다 더 오래 전인 고려 500년이 오히려 지금 우리와 닮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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