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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신’ 시켜준 BBC 다큐가 고마운 이유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이것이야말로 그들(한국인)이 ‘나라 망신(national embarrassment)’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지난 20일 영국 BBC 방송이 유튜브에 올린 새 다큐멘터리 ‘버닝썬’에 달린 영어 댓글이다. 이 댓글은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2019년 한국을 뒤흔들었던 K팝 스타들의 집단 성범죄 사건 ‘버닝썬 사태’를 재조명한 다큐인데, 불과 3일 만에 오리지널 영상과 한글자막 영상 합쳐서 900만 뷰 넘게 시청 되고 4만 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서구의 눈으로 버닝썬 재조명
가벼운 형량에 분노 쏟아져
비뚤어진 팬덤 행태에 경악
“5년 지난 이 시점, 가장 적절”

처음엔 ‘나라 망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팝스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추악한 성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의혹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소위 서구 선진국에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큐를 보니 나라 망신이 맞았다. 그리고 고마운 나라 망신이었다. 외국, 특히 영미권의 시선과 평판에 유난히 민감한 한국에 변화의 압박이라도 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달린 영문 댓글을 통해 본 나라 망신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범죄자 솜방망이 처벌



버닝썬 사건을 다룬 영국 BBC 최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캡처]
첫째는 범죄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다. “한국 사법 시스템은 장난이야? 형량 왜 이렇게 가벼워?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게 분명하네.”(유저 titil0la930) “한 명은 18개월, 또 한 녀석은 6년, 또 하나는 2년 반, 농담이지? 지금 이 흉측한 인간들이 다 출소했다는 얘기네?”(유저 gyuism7914) 등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밴드 빅뱅의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는 성매매 알선, 해외 원정도박 등 9개 혐의에서 모두 유죄였으나 최종 선고는 18개월 징역에 그쳤다. BBC 다큐가 상기시키듯이 그가 실소유주로 알려진 클럽 버닝썬은 단순한 성매매 알선이 아니라 여성 손님들이나 여성 지인들에게 약물을 탄 술을 마시게 해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클럽의 VIP 남성 고객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한 범죄의 온상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승리는 이에 대해서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승리와 단체대화방을 같이 하며 성관계 불법 촬영물을 공유한 싱어송라이터 정준영과 밴드 FT아일랜드 출신 최종훈은 별도의 집단 성폭행 혐의로 유죄가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각각 징역 5년(1심의 6년보다 줄어든), 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다. 이 또한 약물을 사용한 성폭행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이런 경우 영미에서의 형량은 훨씬 무겁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인기 시트콤 ‘댓 세븐티스 쇼’로 유명한 배우 대니 매스터슨은 여성 3명을 약물을 이용해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중 2명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지난해 LA 법원에서 최소 징역 30년, 최대 종신형의 형벌을 선고받았다.

일부 팬들의 눈먼 지지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에서 정준영의 팬이었던 감독(왼쪽)이 최초 보도 기자를 만나는 장면. [사진 오드]
‘버닝썬’ BBC 다큐의 두 번째 나라 망신 포인트는 일부 팬들의 눈먼 지지와 옹호, 그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기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첫 번째 기자(정준영 범죄를 최초 보도한 박효실 기자)가 두 번 유산했다는 사실에 피가 끓어오른다. 키보드 뒤에 숨어있는 온라인 사람들은 살인자야!”(유저 graceababan) 등 이를 지적하는 영문 댓글이 많다.

범죄를 저지른 스타에 대해 일부 팬들이 ‘무지성 쉴드(방어)’를 보이는 것은 결코 한국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강도가 특히 세며, 자신의 스타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돌리거나 다른 사안으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평론가들도 말하듯 K팝 팬덤은 타국 대중음악 팬덤에 비해 유난히 충성도와 헌신이 강하다. 이런 팬덤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음악보다 아이돌 멤버에 대한 애정에 집중해서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 그리고 내 아이돌을 무조건 지키고 1등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전투적으로 “팬질을 정치질로” 하는 문제 등을 안고 있다.

그나마 최근 10여 년간 K팝 팬덤의 과격한 ‘정치질’은 순화되는 추세였다. 2022년 다큐 영화 ‘성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준영의 열혈 팬이었던 젊은 감독이 버닝썬 관련 연예인들의 유죄 확정 후 팬들의 혼란과 죄책감 등을 다룬 영화로, 가장 빛나는 장면은 감독이 박효실 기자를 찾아가 종전에 가했던 비난을 사과하고 서로 위로하는 장면이다.

사실 요즘 더 큰 문제는 이제 “팬질을 정치질로” 하는 게 아니라 “정치질을 팬질로” 하게 되어 K팝 현장이 아닌 정치판에서 팬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정치 팬덤은 지지하는 정치인의 부패 등에 대한 법원 판결이나 검찰 기소를 정치적 박해로 포장하는 게 특징이다. 이런 현상이 그나마 성숙해지는 것처럼 보였던 K팝 팬덤에 다시 악영향을 끼쳐, 음주운전 뺑소니 후 증거인멸까지 저지른 정황의 트로트 가수를 독립운동가라도 되는 양 “지키겠다”는 삐뚤어진 팬들이 나타난다.

클럽과 경찰 유착 의혹 흐지부지

세 번째 나라 망신 포인트는 버닝썬 사건을 파헤친 또 다른 주요 기자 강경윤이 “페미×”이라는 욕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욕으로 쓰인다니 충격적이다”(유저 hr3193)라며 경악하는 영문 댓글이 많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온건한 것부터 급진적인 것까지 다양하지만 한국에서 젠더에 따른 불필요한 구분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급진 페미’로 취급받는다. 마치 모든 우파는 극우 파시스트로, 모든 좌파는 주사파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그런 극단적인 단순화가 모든 건설적인 토론을 막아버린다.

네 번째 망신 포인트는 다큐의 결말이다. 버닝썬 사건 뒤에도 개선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약물 성폭행 사건은 나날이 늘고 있다. 조직적 성범죄 의혹이 있는 클럽과 경찰과의 유착 의혹은 흐지부지 덮였다. 승리가 단체대화방에서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경찰총장”이라 불렀던 지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 출신 윤규근 총경은 2000만원 벌금형에 그쳤고 이번 정부에서도 순탄하게 지내고 있다. 왜 버닝썬 사건은 특검을 하지 않았을까?

유튜브에 달린 한 유저의 영문 댓글이 인상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5년 뒷북인 다큐라고 하지만, 나는 제때에 나온 다큐라 확신한다. 사람들이 용서하고 잊으려 하는 바로 이때, 범죄자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삶을 즐기려 하는 바로 이때, 이 범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는 적절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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