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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파견 싫다, 책임질 일 더 싫다…관가 빨라진 정권말 복지부동 [흔들리는 공직사회]

20일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공무원들이 정부세종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세종=나상현 기자
정부 여러 부처와 협의할 일이 많은 기획재정부 간부 A씨는 최근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부가 KC(국가통합인증마크)를 받지 않은 제품의 해외 직구(직접 구매) 금지를 추진하다 사흘 만에 철회하는 과정에서 '기재부 책임론'이 쑥 들어갔기 때문이다. A씨는 "기재부가 주도하거나 관여하는 대책이 대부분이라 늘 기재부가 비난의 화살을 맞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절묘하게 빠져나갔다"며 "총선 이후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에선 각종 대책 추진 실패에 따른 책임 추궁이 이어질 텐데 앞으로 어렵겠다 싶은 건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야겠다는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국토교통부에선 '용산(대통령실) 파견' 거부가 금기어다. 대통령실 파견은 ‘에이스’ 공무원으로 인증받았다는 의미라 대표적인 승진 코스로 꼽힌다. 부처로 복귀할 때 ‘영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일부 간부가 파견을 꺼리는 기류가 감지되자 "대통령실 파견을 거부하면 반드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경고까지 돌았다. 관가(官街)에서는 ‘용산의 힘’이 벌써 정권 초만 못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 부처가 밀집한 세종시 공직사회가 흔들린다. 정책 추진부터 인사까지 복지부동(伏地不動) 사례가 두드러진다. 2022년 임기 초부터 국회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여전한 데 최근 4·10 총선마저 ‘강성’ 야당이 압승하면서다. 최근 해외 직구 대책 번복 사례도 공무원 사회에선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경종을 울렸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도 역대 최저(20%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임기 중반을 맞아 한창 탄력을 받아야 할 윤석열 정부의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대통령실 파견에 대한 선호가 과거보다 낮아지는 등 인사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된다. 교육부 B국장은 “용산으로 가면 과거처럼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도 어려운데 야당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게 뻔한 정책은 총대를 메고 막아야 한다”며 “일은 고되지만, 티는 안 날 게 뻔하다는 기류가 있다”고 털어놨다. 공정거래위원회 C과장도 “조금 이른 듯한 지금이 딱 애매한 시점으로 접어들었다”며 “까딱 용산으로 파견 나갔다가 정권 말까지 남을 경우 ‘윤석열 정부’ 사람으로 찍혀 난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부처 한 사무관의 PC 화면 캡처. '과수' 국수' 등으로 정리한 파일명이 보인다. 독자 제공
책임 ‘면피’를 위한 기록은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무리하게 탈(脫)원전 정책을 추진한 공무원들이 검찰 수사를 받은 데 따른 트라우마다. 산업통상자원부 D과장은 “산하 기관과 얽힌 업무를 추진할 때 더 조심스럽다”며 “검찰·감사원이 문제 삼더라도 언제든 근거를 댈 수 있도록 e-메일부터 통화 기록까지 모두 남겨둔다”고 말했다. 산업부 E과장은 다른 부처와 정책을 협의하다 가로막히자 '협조 공문'을 보낼지 고민 중이다. ‘우리 부는 최대한 추진했는데, 다른 부처가 반대했다’는 증거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추후 책임 추궁을 피하는 ‘보험’ 성격이다.



보건복지부 F과장은 업무상 통화를 전부 녹음한다. 보고서는 윗선 지시로 고칠 때마다 표시해 둔다. 과장이 수정하면 ‘과수’, 국장이 수정하면 ‘국수’로 파일명을 붙여 저장하는 식이다. 나중에 찾아볼 때 편하기 위해서지만, 혹시 모를 책임을 피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정부 부처가 정책을 입안하는 단계부터 야당 눈치를 보는 흐름도 있다.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지만 ‘맹탕’ 대책을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정권 색채가 짙은 실업급여 개편, 근로 시간제 유연화 등 노동 개혁을 추진하는 고용노동부가 대표적이다. 고용노동부는 야당 공세로 지난해 일명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 프레임에 갇혀 근로시간 개편을 물리는 소동을 치렀다. 고용부 G과장은 “법안을 짤 때부터 야당 예상 반응부터 살펴 반대가 뻔한 내용은 알아서 수정한다”며 “국회에서 입법이 가로막혀 질질 끌려가느니 그나마 얘기라도 통할 법한 수준으로 법안 수위를 조절한다”고 말했다.

이런 업무 추진 방식을 반복하면 정책 추진 시 ‘무기력증’에 빠질 우려가 있다. 기획재정부의 경우 금융투자 소득세 폐지가 대표적이다.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야당 반대가 극심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미는 정책은 후속 브리핑을 하는 등 홍보를 적극적으로 이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아직 잠잠하다. 한결 더 민감한 상속세 개편 등 이슈는 수면 위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기재부 H국장은 “최대한 국회와 협의하겠지만, 정권 말로 갈수록 더 어려울 것 같다”며 “개인의 정치 성향을 떠나 정책 법안이 수월하게 국회를 통과하도록 총선에서 여당이 이기거나, 최소한 선전하기를 바랐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 ‘속도’가 빨라진 데 총선 결과가 영향을 미쳤다면, ‘강도’가 세진 건 ‘학습 효과’ 때문이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로 이어지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에서 집중적으로 추진한 정책에 대한 감사·수사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공무원이 피를 봤다. 행정안전부 I과장은 “‘보신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정책 실패에 대해 만만한 실무 공무원에게만 책임을 묻는 상황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업무를 강단 있게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조태준 상명대 행정학부 교수는 “야당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운데 공직 사회마저 무기력증에 빠진다면 명백한 ‘윤석열 정부’표 대책은 임기 말로 갈수록 추진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개별 대책보다 험난한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개혁 추진은 동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최근 해외 직구 대책이 좌충우돌하는 등 공전하는 건 총선 이후 공직 사회에 퍼진 복지부동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위 공무원일수록 대통령, 용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며 “결국 대통령이 바뀌어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를 복원해 무너진 지지율부터 끌어올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기환(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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