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인간적인
나는 요즘 평행선을 걷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만 병원에서 파트 타임(하루 12시간씩)으로 일하고 나머지 5일은 완전히 나의 자유 시간으로 즐긴다. 풀타임으로 일할 때와는 달리 기분이 묘하다. 병원에서의 시간이 더욱 새롭고 긴장감이 돈다. 당연히 더욱 몰입하게 된다. 가끔 헬리콥터로 이송되어 오는 환자도 있고 언제든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대는 환자와 그의 가족 틈새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면 탈진된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도 나 스스로 이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현대 의학(IT와 AI를 이용한)을 실제로 배우고 또 실천하고 있어 아직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지 않았음에 대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상첨화로 나의 글쓰기 작업에 영감을 얻기도 한다.그렇게 심각하고 의미 있는 이틀을 보내고 난 후 이제 나머지 5일은 나만의 세계에 침잠한다. 파트 타임을 결정하고 난 후 실은 두려웠다. 평생 길들여진 내 생활의 균형이 깨질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한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많이 익숙해졌고 나름대로 여유 있게 즐기고 있다. 일단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다. 여행을 자주 한다. 좋은 패키지가 있으면 일단 숙고한다. 여행이란 건강과 시간,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중 하나만 부족해도 여행은 성사될 수 없다. 가능한 한 세계 곳곳을 방문해 보고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배우고 싶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마사 메데이로스의 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의 일부다. 또 D. H. Lawrence는 말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만 자유롭다. 그 자유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 뛰어드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렇다. 나는 이 5일 동안에 나 자신만의 세계에 뛰어든다. 단지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살아있음은 눈이 반짝이고 심장이 뛰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현에 적극적인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은퇴가 아득했을 때는 많은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메꾸어 나갔다. 생활이 나를 끌어나갔고 나는 기계의 한 부품이 되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러다가 은퇴 생활에 한 발을 넣고 보니 갑자기 내 남은 생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아있는 시간을 모르기에 초조해진다. 이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100세 시대라고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생산능력보다 소비가 많아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이 당신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기 전에 지혜와 사랑으로 당신이 삶의 심장부를 넓혀갈 수는 없을까.
AI 세계에 푹 뼈져 사는 한 후배가 AI로 노래를 만들었다며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배한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난 정말 듣기 고통스러웠다. 감정이 하나도 이입되지 않은 로버트가 부르는 노래 같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후배는 나에게 아직도 종이책을 읽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난 아직도 종이책이 좋다. 종이책은 좋은 묘사나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고 밑줄을 쳐가며 노트할 수 있다. 종이책은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좀 더 인간적이다. 사람 맛이 난다. 젊은이한테는 지식을 배울 수 있으나 노인한테는 지혜와 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당신이 세상을 꼭 껴안으면 삶의 중심부는 넓어질 수밖에 없다. 노인 스스로 삶의 중심부와 가장자리에 선을 그어놓고 자신을 가장자리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명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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