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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거지 대장'과 결혼한 日관료 딸…목포 울린 위대한 사랑 [백성호의 현문우답]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일제 강점기였다. 버려진 고아들을 보살피는 조선인 ‘거지 대장’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결혼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답이 전남 목포의 공생원(共生園)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지난달 22~24일 전남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갔다. 전남 영광과 신안, 목포를 거쳐 순천과 여수를 찾아가는 순례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포의 공생원이었다. 거기에는 계급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다.

#거지 대장과 총독부 관료의 외동딸

윤치호(1909~?)는 14세에 소년가장이 됐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마쳤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이듬해였다. 길을 가던 그는 고아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굶주리는 떠돌이 고아들 일곱 명이었다. 19세의 윤치호는 고아들을 데리고 유달산 자락으로 갔다. 유달산은 돌산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날부터 윤치호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식량이 없을 때는 직접 동냥까지 했다.

1949년 목포 공생원. 앞줄 가운데 동그라미 친 아이가 윤치호 전도사와 다우치 지즈코 여사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아이를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사진 공생원

갈수록 찾아오는 고아들이 늘었다. 윤치호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공생원’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고 불렀다. 공생원의 고아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선생이 필요했다.

마침 목포 정명여고의 일본인 음악 선생이 공생원에 와서 도와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기독교인이었다. 함께 일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고아들의 대부이자 ‘거지 대장’이었고, 여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누가 봐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지즈코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지.”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일제 강점기 때 목포 공생원의 모습. 당시 목포에 있던 사진관에서 공생원 사진을 가끔 찍었다. 사진사가 임종 전에 "공생원 사진은 버리지 말고 꼭 공생원에 전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덕분에 일제 강점기 때 공생원의 사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진 공생원

한교총 이철(감리교 감독) 공동대표회장은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밖에 안 된다. 당시에는 더 적었다. 지즈코 여사의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남편 윤치호와 고아들을 향한 숭고한 열정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아들, 인민재판에서 아버지 구해

1945년 8월 해방이 됐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우치 지즈코는 조선에 남았다. 윤치호와 지즈코는 2남 2녀를 두었다.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5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했다. 공생원의 고아는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목포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ㆍ경찰 가족과 목사ㆍ전도사는 마을 공터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윤치호 전도사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500명의 고아가 찾아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였다.

목포 유달산을 배경으로 찍은 공생원의 고아들. 당시만 해도 유달산은 바위산이라 산자락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사진 공생원

인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대신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을 강제로 맡겼다. 몇 달 뒤에 국군이 들어왔다.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빨갱이’로 몰렸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밑거름

1951년 윤치호는 공생원 고아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려고 전남 도청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남편이 실종됐지만 지즈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생원 고아들을 자식처럼 계속 돌보았다.

1960년이었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지즈코 여사는 15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모녀의 극적인 상봉을 방영했다. 그 방송을 보고서 일본에 여러 후원회가 생겼다. 덕분에 공생원은 남녀 고아들을 중고등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다. 60년대에는 공생원 바깥에서도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1968년 다우치 지즈코 여사가 소천하자 목포시는 첫 시민장으로 치렀다. 당시 목포시 인구는 17만 명, 그중 3만 명이 목포역에 마련된 영결식장을 찾았다. 사진 공생원
목포 공생원에서 이연 상임부회장이 다우치 지즈코 여사와 윤치호 전도사의 사랑과 봉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포=백성호 기자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병석의 무의식 상태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NHK에서 2000년에 방영됐다. 이걸 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직접 공생원에 전화해 “너무 고맙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며 매실나무 20그루를 보냈다.

공생원 이연 상임부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관계를 회복하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했다. 김 대통령도 목포 공생원을 무척 아꼈고, 오부치 총리는 매실나무까지 보냈다. 두 정상 간 만남에서도 공생원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총신대 허은철 교수(역사교육과)는 “지금껏 공생원을 거쳐 간 고아가 3000명이 넘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와 지즈코 여사가 함께 일군 공생원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며 “여기에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애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성호(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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