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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던 부모가 "돈 불려줄게"…정착·후원금 800만원 뜯어갔다 [소외된 자립청년]

자립청년 강현중(26·가명)씨가 쌍둥이 형과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육원에 맡겨진 뒤 떠난 소풍에서 찍은 사진. 현재는 바리스타 일을 하면서 미국에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독자 제공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 이혼으로 서울 용산구의 한 보육원에 맡겨진 강현중(26·가명)씨는 8년 전 아버지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았다. 보호종료기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아버지는 “보육원에서 나올 때 받은 돈을 주면 크게 불려주겠다. 넌 경제관념이 없으니 내게 맡기라”고 했다. 강씨는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보육원에서 모은 후원금 300만원을 합쳐 약 800만원을 아버지에게 건넸지만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 강씨는 “아버지가 생활비와 대출 갚는 데 돈을 다 쓴 것 같다. 성인이 되면 생기는 목돈을 노리고 일부러 자식을 보육원에 잠깐 맡기는 부모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강현중씨가 지난 1월 친구들과 실내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모습. 독자 제공
자립준비청년은 만 18세에 아동양육시설·공동생활가정(그룹홈)·가정위탁 등에서 독립하면서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자립정착금을 받는다. 지역별로 서울은 2000만원, 경기·대전·제주는 1500만원, 경남은 1200만원, 그 외 시·도는 1000만원이 지급된다. 2019년부턴 매달 30만원(현재 50만원)의 자립수당도 보호 종료 뒤 5년간 받는다. 이외에 2007년부터 아동발달지원계좌(CDA·디딤씨앗통장)에 민간 기부자들이 보낸 후원금을 모았다는 퇴소할 때 한꺼번에 주기도 한다. 자립 뒤 학자금이나 주거비, 직업 훈련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제도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이 같은 목돈을 생활경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립준비청년이 가까운 지인에게 뺏기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지연(24·가명)씨는 남자친구에게 뜯긴 경우다. 박씨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제한 남자친구로부터 “보육원에서 나와 같이 살려면 원룸 보증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모아둔 후원금 800만원을 건넸다. 한 달 뒤 남자친구는 다른 여성과 돈을 갖고 잠적했다. 박씨는 “주변에서 아무도 돈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아 나이를 먹어도 돈을 모으거나 쓸 줄 모른다”며 “몸만 큰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김주원 기자
분양사기·중고거래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19년 보육원에서 나온 이모(26)씨는 2021년 서울 강남 길거리에서 7억1500만원짜리 오피스텔 분양 사기를 당했다. 부동산 지식이 전무했던 이씨는 “계약금 10%만 내면 나머지 분양금은 대출 80%에 나머지는 월세로 충당하면 되는 좋은 물건”이라는 분양대행사 직원의 말만 믿고 정착금과 후원금, 보육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과 대출 3000만원을 받아 계약금 1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영종도 신도시의 해당 오피스텔은 잔금 대출이 최대 40%밖에 안 된 데다 임대수요도 없어 계획했던 대로 소유권은 갖지 못한 채 계약금 반환 소송을 힘겹게 진행 중이다. 이씨는 “대행사 직원 설명과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다"며 "시키는 대로 서명했을 뿐인데 큰 빚만 떠안게 됐다”며 “도움을 줄 가족도 없는데 당황스럽고 무섭다”고 토로했다.

중고차 사기를 당하거나 유흥·게임 등에 목돈을 탕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굿네이버스 경남 자립준비전담기관 황민주 과장은 “보험료나 수리비 등 관리 비용에 대한 개념 없이 중고차를 사다보니 사후 관리가 어려워져 카푸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비싼 명품을 사거나 성형수술을 하며 수백만 원을 한 번에 다 썼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자립준비청년을 등치는 하이에나 때문에 “보호종료 전후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교육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중앙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자립준비청년 20명 중 7명도 ‘자립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경제·취업 관련 교육을 꼽았다. 보육원 출신 A씨는 “아르바이트 면접 갈 때 복장·말투 등의 에티켓이나 전세 계약서를 쓸 때 주의할 점 등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삶의 지혜를 알려줄 어른이 없다는 게 가장 답답하다”며 “인생의 롤모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인데 이들을 만날 기회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윤모(28)씨도 “물고기를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정부는 2011년부터 보호 종료 전에 일상생활, 자기 보호법, 돈 관리, 진로 탐색, 직장생활 기술 등 자립준비교육을 아동양육시설과 그룹홈에서 매년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을 한데 모아 같은 수업을 듣게 하는 등 형식적인 교육”이라고 자립준비청년들은 입을 모았다. 실제로 202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1~5년 차 자립준비청년 31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상생활·자기보호·돈 관리·지역사회자원 활용·사회적 기술 등 기초자립 교육 5과목 가운데 참여했다고 응답한 프로그램은 평균 1.75개에 그쳤다. 진로탐색 및 취업기술·직장생활기술 등 진학 교육 2과목 중에선 평균 0.53개에 불과했다. 보육원 출신 B씨는 “시간을 때우다 사진 촬영만 하고 끝내는 교육이 부지기수”라며 “매번 비슷한 내용의 수업이 반복돼 집중하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사기 등 범죄에 노출되거나 단기간 목돈을 탕진해 생계가 곤란해진 뒤 고립감과 우울감에 빠지고 또 다른 범죄에 노출되는 악순환을 우려한다. 변금선 서울연구원 청년정책연구단장은 “지원기관과 연락이 두절된 자립준비청년들은 가족과 함께 사는 일반적인 고립·은둔 청년과 달리 심각한 사회·경제·행정적 단절 상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들의 사회적 고립은 중장년, 노년 시기의 노인 빈곤과 고독사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믿을 수 있는 주변 어른 없이 보육원 선·후배 관계 중심으로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다 보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어려워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자립준비청년
보호자가 없거나 양육을 포기해 아동보육시설·그룹홈·위탁가정에서 성장한 뒤 만 18세가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 청년. 보호종료 이후 5년간 정착지원금 및 자립수당 등 정부 지원을 받는다. 정부는 2019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립준비청년이 20명이라고 집계했다. 하지만 정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청년들의 죽음은 훨씬 더 많았다.




김서원.정세희.박종서(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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