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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을 보는 건 축복 아닌 저주"…박찬욱식 블랙코미디 ‘동조자’

박찬욱 감독이 공동 쇼러너로 참여한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 박 감독은 시리즈 전반부인 1~3부를 연출했다. 사진 쿠팡플레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당하기 직전 탈출한 대위(호아 쉬안데)에게 미국인 기자가 묻는다. “미국 학생 운동권의 지지와 연대를 느끼셨나요? 우리는 당신들, 베트남 국민 편이에요.” 대위는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며 되묻는다. “어떤 국민이요? 북부? 아니면 남부?”

HBO 시리즈 ‘동조자’(The Sympathizer) 2화에 나오는 이 장면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한다. 시리즈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7부작으로, 베트남 혼혈 청년인 대위가 1970년대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두 개의 문명과 이념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다.

'동조자'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사진 쿠팡플레이

'동조자'는 영화 ‘헤어질 결심’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다. 2018년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에서 처음 시리즈 연출을 맡았던 박 감독은 이번 작품에선 돈 맥켈러와 공동 쇼러너(co-showrunner)로 이름을 올렸다. 쇼러너는 제작·각본·연출 등 작품의 전반을 진두지휘하는 총괄을 일컫는다. 연출은 세 명의 감독이 회차 별로 나눠 맡았는데, 박 감독은 시리즈 전반부인 1~3회를 연출했다.



시리즈는 국내에선 지난달 15일부터 쿠팡플레이를 통해 매주 월요일 한 회씩 공개되고 있다. 현재 박 감독 연출분인 3회까지 공개됐고,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공개 뒤 2주 연속 TV 시리즈 부문 톱10에 올랐다. 앞서 공개 전 월드 프리미어 이벤트에서는 미국 현지 언론으로부터 “대담하고 야심차다”(타임지), “주제의 무게를 잘 담아낸 블랙 코미디“(TV가이드) 등의 호평을 받았다.

시리즈로 보는 박찬욱의 영화적 연출
“흔히 두 개의 관점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것을 능력과 축복으로 말하지만, 저는 그걸 저주받았다고 표현했어요.”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박 감독은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의 혼혈인 주인공 대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양쪽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설 수 없다는 것을 뜻하고, 이념 대립·분단·전쟁 상황 등 양 편이 극단적으로 투쟁할 때는 더욱 만족할 수 없는 저주와 같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영화 '동조자' 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대위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인물이다. 시리즈 내내 이름 없이 직급으로 불리는 그는 남베트남 비밀경찰대에 잠입한 북베트남 스파이다. 독방에 갇혀 진술서를 쓰는 첫 장면부터 대위는 시청자에 대화를 걸고, 시리즈는 그의 내레이션과 함께 전개된다. 극 중 심심찮게 등장하는 리와인드(되감기) 기법은 사건과 상황의 이면을 들춰내는 용도로 사용된다.

박 감독은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연출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는 “행동과 대사로만 이뤄지는 영화 각본과 다르게 소설은 마음속 생각을 풍부하게 적어 놓는다. 문학만이 가진 특징이기에 이것을 영화로 옮겨내기엔 일반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면서 “시리즈화를 제안받고 내러티브 장치를 설정하는 것을 가장 먼저 고민했다”고 밝혔다.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동조자'에서 4개의 각기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사진 쿠팡플레이
한국계 배우로 잘 알려진 산드라 오는 극중 아시아계 미국인인 소피아 모리로 등장해 주인공 대위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사진 쿠팡플레이

연출 기법이 두 개의 시선을 담아내는 데 최적화됐다면, 개별 캐릭터는 양 극단에 함몰된 시대상에 대한 풍자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가장 화제가 됐던 건 1인 4역을 맡은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다. 그는 아시아에 대해 무지한 동양학 교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하원 의원, 영화감독 등 정치·안보·교육·문화 각 분야에 자리 잡은 각기 다른 백인 남성을 연기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4개의 얼굴을 한 배우가 표현함으로써, 할리우드와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극대화한 것이다.

박 감독이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라고 밝힌 장군(토안 레)은 블랙코미디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다. 장군은 미국에 정착해 스파이 활동을 이어가는 대위에게 난민들 사이에 숨어있는 두더지(스파이)를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왕관을 쓴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권위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념과 사상으로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는 상황을 주인공 대위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희화화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극 중 장군은 비합리적인 모습이 극대화되어 있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캐릭터들 역시 지나치게 할리우드화된 캐릭터다. 각 인물의 과장된 측면이 주는 웃음이 있다”고 말했다.

색채와 미장센을 중시하는 박 감독 특유의 연출관이 녹아든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가늠케 하는 1화엔 베트남을 연상케 하는 빨강과 노랑 색채가 스며들어 있다. 정 평론가는 “박 감독은 이전 시리즈에서도 미장센 뿐 아니라 화면 전환 등 상당히 영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녹여냈다. 이번에는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유머 코드가 미장센 안에 녹아 들어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봤다.



어환희(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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