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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재혼, 김구 파혼…여인과의 만남은 둘다 박복했다

추천! 더중플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합니다.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는 지금의 정치판도 길게 보면 그리 생경한 풍경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사상사의 대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혼돈의 해방정국이 오늘날의 난맥상에 힌트를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이승만(1875~1965)과 김구(1876~1949) 현대사의 두 거인의 엇갈린 운명을 소개합니다.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만든 지식 구독 서비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상하이 임시정부의 비극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식이 끝나고 기념촬영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의원들. 둘째 줄 왼쪽에서 7번째가 이승만 대통령이고, 맨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김구 경무국장이다. [국가기록원]
당사자나 유족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1919년 3·1운동은 그 최종 목표인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라는 사실이 지식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결국 “이 길이 아니었다”며 조국을 떠나 만주로, 상하이(上海)로, 미국으로 갔다. 대략 상하이에만 500여 명이 모였고, 그 가운데 120명 정도가 이런저런 이름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29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의정원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국무원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김구는 격이 낮은 경무국장에 취임했다. 당시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국무총리직을 대통령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면서 ‘프레지던트(President)’라는 직함을 사용했고, 임정은 그의 뜻을 추인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하이에 건너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1년 반이 지난 1921년 1월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갈등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은 통속적이게도 돈 문제였다.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한 3개월 동안 임정이 그에게 가장 기대했던 것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경제 상황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가 임정을 도와준 것은 공식적으로 200달러가 전부였다. 레닌이 그 곤궁한 틈새를 타고 1921년 임정에 60만 루블을 금괴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화근이 됐다. 금괴를 둘러싼 추문과 분규가 살인으로 번져 상하이 임정이 분열하는 일차적 계기가 되었고, 엉뚱하게 이승만에 대한 원성이 고조됐다.(『김철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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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2. 달라도 너무 다른 이승만과 김구, 하나의 공통점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미국의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으나 끝내 유교적 권위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은연중에 공·사석에서 “과인(寡人)…”이라는 말을 썼고(손세일),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라 연설했다.



반면 역모 사건으로 처형된 김자점의 후손인 김구는 가문에 대한 열등감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는 항일투쟁으로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미 명망을 얻었음에도 상하이 임시정부의 경비원을 자청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게 전부였던 김구는 미국 최고 명문 출신인 이승만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여인과의 만남에선 이승만이나 김구 모두 박복했다. 이승만은 겨우 15세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대로 박씨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하나 얻었다. 1905년 미국으로 떠날 때 아내는 버리고 아들만 데리고 갔다. 이승만은 1933년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재혼했다. 수절하던 첫 아내는 한국 전쟁 때 북한군에 납치됐다.


김구는 네 번이나 파혼을 당했다. 처음엔 안중근의 누이와 혼담이 오갔으나 안중근 아버지 안태훈의 반대로 혼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뒤엔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안창호가 반대해 이뤄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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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 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3. 죽음이 갈라놓은 역사적 평가
1946년 8월 15일 열린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함께한 우남 이승만(왼쪽)과 백범 김구. [중앙포토]
1949년 6월 26일, 현역 군인 안두희 소위는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으로 찾아가 네 발의 총탄을 쏘았다. 안두희는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수형 1년8개월 만인 1951년 2월에 석방되고 다시 2년 뒤 복권되어 군수사업으로 성공했다. 그의 암살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두희는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은 채 79세까지 살다 박기서의 몽둥이, 일명 '정의봉(正義棒)'에 맞아 죽었다. 김구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오래 사는 게 오복 가운데 첫째라지만, 이승만의 경우 오래 산 것이 욕이 되었다. 역사에는 모든 정치인이 과오와 함께 공업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덕이 과오를 덮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4.19 혁명이 일어나도록 그 시대의 풍조가 민주주의적이었던 것은 이승만이 통치를 잘 했기 때문"이라면, 수유리에 묻힌 150명의 젊은 영혼은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은 이러한 대조적이고도 상호보완적인 두 타입의 민족 지도자들이 화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김구는 그 노회함이나 국가 경영 능력에서 이승만을 따를 수 없었다. 그가 설령 이승만을 이겼다 하더라도 그의 격정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장해줄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구의 『백범일지』는 감동을 주고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1941)는 지혜를 준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슴으로 산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없다.



이경희(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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