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국가와 교역국가, 남양사를 이해하는 두가지 축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9>]
만들 당시의 용도는 악기이자 제기(祭器)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후세에는 보물로 취급되어 중요한 교역 대상이 된 것 같다. 만들어진 곳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남양 곳곳에서 발견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둘 다 250쪽 전후의 얇은 책인데, 로커드의 책에 활용 가치가 크다. 처치의 책은 국가별로 서술되어 있고 ‘동남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 로커드의 책은 확실한 그림은 아니라도 최신 연구성과를 활용해 넓은 시각을 세우려는 노력이 분명하다.
청동기보다 견고하고 원료가 흔한 철기는 농기구에 많이 쓰이면서 농업생산량을 크게 발전시켰다. 청동기사회는 잉여생산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조직의 확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특색이 다른 문화들이 전개되곤 했다.
기원전 10세기에서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홍하(紅河) 유역의 동손 문화는 고도로 발달한 청동기문화였다. 비슷한 시기에 남쪽에는 참파의 연원으로 추정되는 사후인(Sa Huynh) 문화가 펼쳐졌다. 사후인 문화는 교역이 활발했고 기원전 6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교역이 활발한 지역에 외부의 제철 기술이 먼저 들어온 것으로 이해된다.
당나라 승려가 전한 해상제국의 모습
국가 형성의 계기는 교역 방면에서도 만들어졌다. 7-11세기에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존재한 스리비자야 제국의 모습 일부가 당나라 구법승(求法僧) 의정(義淨, 635-713)의 기행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内法傳)〉으로 중국에 전해졌다.
의정은 인도로 가는 길에 스리비자야에 들러 반년간 체류했고, 11년 후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8년간 체류했다. 가는 길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익히는 등 준비를 위한 체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구해 온 경전의 번역 작업을 위한 체류였다.
번역을 위한 체류가 왜 그렇게 길었을까? 떠오르는 의문이 있을 때 물어볼 만한 사람들이 그곳에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8년의 체류 중 지필묵을 구하러 한 차례 광저우에 다녀갔다는 대목을 보면, 불교국가 스리비자야에서 번역 작업을 위한 최상의 환경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은 것은 해상국가의 운명일 것이다. 스리비자야의 실제 모습은 같은 시기 대륙부의 농업국가들처럼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의정이 귀국을 8년이나 늦출 만큼 좋은 작업 환경을 제공한 국가라면 당시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 독립을 위한 중국 쪽 배경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왕조시대에 접어든 데는 중화제국의 성격 변화와 관련된 측면이 있다. 당나라까지 인신(人身) 지배의 국가가 송나라부터 영토 지배의 국가로 바뀐 것이다. 문벌 아닌 과거제를 중심으로 관리를 등용하게 된 것이 대표적 변화였다.
송나라 태조가 천하 (재)통일을 앞두고 공신들을 모은 자리에서 집단 은퇴를 권한 일이 “한 잔 술에 군대 내놓기(杯酒釋兵)”란 일화로 전해진다. 공신들은 군벌이었다. 송나라가 군벌 연합을 넘어 보편적 (유가) 원리에 입각한 제국체제로 자리 잡는 장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한 무제의 남월 정벌(기원전 111) 이후 938년 응오쿠옌(Ngô Quyền 吳權)의 즉위까지 1천여 년간을 베트남의 ‘중국 지배시대’로 본다. 이 시기에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주 소개한 시니엡(士燮, 137-226)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니엡은 교주에 6대째 자리 잡은 집안 출신이고 그 아버지는 일남(日南, 교주의 속군) 군수였다. 한나라의 관점에서는 변방 호족(豪族)이다. 시니엡이 초년에 상서랑(尙書郞)으로 출사한 것은 변방 호족 자제의 전형적 진로였고 그 아버지의 사후 교지(交趾) 군수로 임명된 것은 문벌의 계승이었다.
삼국시대의 중원 국가들이 교주 같은 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상황은 제갈량의 실속없는 남만(南蠻) 정벌로 알아볼 수 있다. 손권의 오나라는 시니엡의 우호적 태도에 만족했다. 시니엡과 같은 변방 실력자들은 최소한의 부담으로 중원 제국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자기 지역에 군림하는 데 중원 제국의 권위를 이용했다. 중원 제국의 힘이 비교적 강했던 시기가 당나라 때(618-907) 많았고, 당나라 멸망 후 베트남의 독립왕조 시대가 시작한 것이다.
리버먼의 “헌장 시대”가 끌리지 않는 이유
리버먼의 책을 반도 안 읽은 내가 그 관점을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끌리지 않는 까닭을 설명할 수는 있겠다. 무엇보다, 영토국가 중심으로 그 지역 역사를 보는 시각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내가 보는 남양사의 첫 번째 특성은 영토국가의 역할이 작았다는 데 있다. 큰 강 유역의 농업국가들이 인근의 교역국가들에 비해 영토국가의 성격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교역국가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 사실을 생각하면 영토국가의 성격만으로 그 역사를 살피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대륙부의 ‘헌장 체제’를 보편적 현상으로 꾸미기 위한 무리한 재단도 마음에 걸린다. 참파는 농업국가보다 교역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부에 위치하고 인도 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억지로 ‘헌장 체제’에 끼워 맞추는 데 걸리는 문제가 많다.
다이비엣의 경우도 파간, 앙코르와 발전의 궤적이 전혀 다르다. 리버먼이 중시하는 농업국가의 성격이 다이비엣에서는 수백 년 앞서서 갖춰져 있었다. 다이비엣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확보한 시점이 파간이나 앙코르가 농업국가의 성격을 갖춘 시점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헌장 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농업 발전과 교역 확장이 남양사 전개의 양대축이었던 만큼 국가체제의 발전도 농업국가와 교역국가의 두 갈래로 펼쳐졌다. 교역국가는 농업국가에 비해 흔적을 적게 남겼을 뿐 아니라 농업 위주의 문명관 때문에 학술계의 주목을 덜 받아 왔다. 남양사의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교역국가의 모습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기협(orun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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