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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소문난 효자, 페미니스트, 100세 넘겨 고려 최장수…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최루백의 삶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옛날 보통 사람의 삶을 복원해보고 싶어 한다. 고려·조선의 보통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조상이고, 현재 우리도 모두 보통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역사학자의 호승지심(好勝之心)을 부추기는 요소가 있다. 남아 있는 사료 거의 다가 소수 지배층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의 삶은 사료를 거꾸로 읽어야 복원할 수 있다. 어려운 만큼 보람 있는 일이지만, 사료의 한계는 절대로 쉬 넘어설 수가 없다. 특히 고려시대가 그렇다. 고려 앞의 삼국시대는 오히려 『삼국유사』 같은 데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남아 있고, 조선 시대는 유명하지 않은 인물의 일기가 여럿 남아 있지만, 고려는 그런 사료가 없다. 그런 가운데 최루백(崔婁伯)은 참 반가운 사람이다. 여러 사료에 조금씩 나오는데, 그 조각들을 찾아 모으면 고려시대 보통 사람의 삶을 얼마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료 부족 ‘보통의 삶’ 복원 한계
최루백 예외, 그를 통해 추정 가능

“이름 경애…함께 못 죽어 애통”
첫째 아내 죽자 애틋한 묘지명

자녀 유교식 이름, 장례는 절에서
큰딸 남편과 사별 뒤 친정 돌아와



아버지 해친 호랑이 죽여 복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있는 최루백 효자비각. 효자 최루백을 기리는 189㎝ 높이의 정려비가 비각 안에 있다.
최루백의 이름은 우선 『고려사』 열전(列傳)에 나온다. 열전이란 개인의 전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고려시대 인물 약 1000명이 올라 있는데, 그 가운데 효자·효녀 17명을 따로 모은 효우편(孝友篇)에 들어있다. 그에 따르면 최루백은 수원의 향리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의 본관이 수원이며, 조상들은 아직 중앙의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대대로 수원에서 향리 직을 세습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열전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최루백이 열다섯 살 때 최상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다. 최루백은 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는데, 어머니가 만류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쫓아갔다. 호랑이가 배가 불러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네가 내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도끼로 내리쳐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담아서 개울가에 묻었다. 또 아버지의 뼈와 살을 골라내서 장사지낸 뒤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가져다 먹었다.

해주오씨 족도. 집안 계보를 그린 그림으로 최루백의 이름이 나온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이 일로 최루백은 고려시대의 효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뒤 과거에 급제했는데, 향리 집안의 자제가 급제해서 관리가 되는 것은 고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고려사』 다른 곳에는 1153년(의종 7년) 11월에 기거사인(起居舍人) 최루백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과 1158년 9월 국자사업 최루백이 국자감시의 시험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거사인과 국자사업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만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이고, 외국에 사신 가는 것과 과거의 시험관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단히 특별한 경력은 아니었고, 최루백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하나의 유물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이라는 유물이 있다. 봉성현군이라는 외명부(外命婦, 관리의 부인에게 주는 관직)를 가지고 있던 염씨(廉氏) 부인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돌에 새겨 무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염씨 부인의 묘지명을 새긴 석판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인데, 이 묘지명을 지은 사람이 바로 염씨의 남편 최루백이었다. 최루백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기리며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이다”라고 해서 그 이름을 밝혀놓은 것이다.

부인과 딸의 이름을 남기다

고려 500년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이름은 거의 없다. 여성에게 이름이 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다. 하지만 염경애의 존재는 그 의문을 깨끗이 씻어준다. 여성도 이름이 있었지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마침 염경애의 친정어머니 심씨의 묘지명도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심씨의 이름은 지의(志義)이고, 정애(貞愛)라는 둘째 딸이 있었다. 또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귀강(貴姜)·순강(順姜) 두 딸이 있다고 되어 있다. 다른 묘지명들은 모두 딸의 이름을 감추고 첫째 딸, 둘째 딸 하는 식으로 기록한 데 비해서 최루백은 아내뿐 아니라 딸들 이름도 모두 알렸으니,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라고나 할까? 심지의·염경애·염정애·최귀강·최순강 다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시대 여성 이름 전부라고 하면 좀 놀라운 일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의 앞면. 고려 사람 최루백의 첫 번째 아내 염씨에 관한 기록인 ‘묘지’와 그를 칭송하는 ‘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최루백이 지은 염경애 묘지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황통 6년 병인년(1146년) 정월 28일에 최루백의 처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를 마련했다가 2월 3일에 화장하고 유골을 봉해서 서울 동쪽 청량사(淸凉寺)에 모셨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1148년)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사지냈으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여기서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불교국가답게 장례의 단계 단계마다 절이 등장한다. 또 빈소를 차렸다가 닷새 되는 날 화장하고 3년 만에 장사지냈는데, 요즘 많이 하는 화장 후 매장 풍습이었다. 장지는 친정아버지 곁으로, 친정어머니 심씨는 남편 곁에 묻혔으니, 부모와 딸이 사후에 한데 모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의 뒷면. 고려 사람 최루백의 첫 번째 아내 염씨에 관한 기록인 ‘묘지’와 그를 칭송하는 ‘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묘지명에 의하면, 염경애는 스물다섯에 최루백과 결혼했다. 고려시대 남녀의 결혼 연령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이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또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고려시대의 평균 자녀 수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또한 귀중한 자료이다. 아들들 이름은 위부터 단인(端仁)·단의(端義)·단례(端禮)·단지(端智)라고 지어서 단을 돌림자로 하고 유교의 4덕(四德)인 인·의·예·지를 이름자로 썼다. 그러면서도 4남 단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고 했으므로 유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고려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또 큰딸 귀강은 남편이 죽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절대 출가외인(出嫁外人)일 수 없는 고려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최루백의 덤덤한 기록은 고려 사람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고려시대 여성 재혼도 거리낌 없는 일

『오륜행실도』에 실려 있는 고려 사람 최루백에 관한 그림.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婁伯捕虎)’라는 제목이 오른쪽 위에 보인다. 『오륜행실도』는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도』를 기반으로 정조 21년(1797)에 편찬한 책이다. [사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묘지명은 고인에 대한 기록인 ‘묘지’와 고인을 칭송하는 운문인 ‘명(銘)’으로 이루어진다. 최루백은 묘지 뒤에 다음과 같은 명을 붙였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먼저 떠난 부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함께 죽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남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부인이 죽은 뒤 재혼을 했다. 이 사실은 최루백 본인의 묘지명이 남아 있는 바람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처음에 ▤▤▤와 결혼해서 4남 2녀를 두었다. 유▤▤와 다시 결혼해서 3남 2녀를 두었다”(▤는 읽을 수 없는 글자)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최루백의 재혼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재혼은,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혼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부다처제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려는 엄격한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상처 후의 재혼이 오히려 그 근거가 된다.

‘해주오씨 족도’에 최루백이 또 한 번 등장한다. 족도(族圖)란 본격적인 족보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 집안의 계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이 족도는 1401년(태종 1)에 만들어졌는데, 조선 전기 가계 기록답게 자기 집안뿐 아니라 처가의 조상까지 기록했고, 그 덕분에 4세 오찰(吳札)의 처증조로 최루백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뜻밖의 곳에서 그 이름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최루백의 묘지명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갑자(古甲子)로 전몽은 을(乙), 적분약은 축(丑)이니, 을축년 즉 1205년이 되는데, 첫 부인 염경애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59년 뒤이다. 염경애의 생년이 1100년이므로, 두 사람이 동갑이면 최루백의 향년이 105세이고 5년 연하라도 100세가 된다. 젊어서 호랑이 고기를 먹어서였을까. 아무튼 고려의 최장수 기록이다. 이렇게 고려 사람 최루백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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