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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의 퍼스펙티브] 한국 실용외교의 카드는 제조 역량과 문화 파워

혼돈의 국제질서, 한국 외교의 길은
퍼스펙티브
국제 정세의 거대한 체스 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쟁 지역이나 주요 국가들 모두 국내 정치와 국제 관계에 있어 혼돈기에 접어들고 있다. 미국 대선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동북아 갈등도 1년 뒤를 내다보기 어렵다. 국제 질서와 규범의 파편화는 안보와 경제 두 차원에서 외교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에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더욱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혼돈의 시기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리셋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국제 질서를 논의할 핵심 그룹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그게 ‘주요 7개국(G7) 플러스’일 수도,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초청장 여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른다는 자조는 G7의 작동구조를 이해한다면 난센스다. 오히려 형식이 아니라 실력으로 그 리그에 당당히 들어가는 게 중요하고, 그게 그리 불가능한 전망만은 아니다. 대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더욱 적극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체제는 자산…동맹 플러스 차원에서 실용외교를
가치와 실용은 대척점에 있지 않아, 맹목과 단순화 경계해야
조용하면서 강한 외교력 발휘하는 유럽 국가들 눈여겨봐야
정부·의회·학계·기업 간 소통 강화하는 외교 자문기구 긴요해

재임 기간 내 성과에 강박감 금물

한편에서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맹외교의 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명분과 가치보다 실리를 우선시하자는 실용외교의 논리는 현실정치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용외교는 누구와 할 것인지에 대한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방법론의 문제다.



[일러스트=박용석]
외교는 점과 선과 면으로 구성된다. 점점이 놓여 있는 핵심 인사들을 관리하고, 기업과 기관들과 연계를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된다. 점을 찍고, 모으고, 선을 잇는 작업을 통해 대외적으로 비치는 면의 외교가 완성된다. 특히 안보와 동맹 관리에 있어서는 큰 방향을 보여주는 그림을 갖출 필요가 있다. 격을 따지고, 의전을 갖추고, 거대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면’에 집착하는 외교는 자칫 공허해지기 쉽다. 촘촘하게 갖춰진 점과 선이 없이 만들어진 외형은 잠시 열광하다가 사라지는 홀로그램과 같다.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또 다른 면을 급조하는 것이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임 기간 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은 단임제 정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실용외교가 가장 피해야 할 걸림돌이기도 하다. 허식을 벗는 게 실용외교다. 그 인식을 지도자와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이해관계를 다루는 경제외교는 큰 차원에서의 담론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차원에서 얽혀 있는 수많은 개별 사례들을 풀어내야 한다. 여기서는 얼마나 많은 점과 선을 잇는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점과 선이 있으면 빠르게 면을 만들고 모양새를 복원할 수 있다. 실용외교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네트워크는 종종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신뢰와 협상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비(非)우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이러한 점과 선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의외로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많다.

빈틈없는 계산과 정책 일관성 중요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이러한 실용외교를 잘 추진한 사례로 꼽힌다. 경제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력을 세계 곳곳에 깔아두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가진 것보다 하나씩 적게 내보인다. 그 신중함이 협상력을 높인다. 네덜란드는 고도의 개방성과 실용성을 과학 혁신과 접목하는 한편, 국제 규범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계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축을 만들어왔다. 인접한 옛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서 진영의 가교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낸 핀란드도 생존 전략에 있어 실용성을 깔고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구 500만의 국가인 핀란드는 국제 평화 중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말과 감정을 아끼면서도, 빈틈없는 계산과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 데 있다.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사례들이다.

문화 소프트파워 활용 공간 넓어져

한국은 실용적인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세 개의 카드가 있다. 첫 번째 카드는 제조업 역량이다. 자동차에서 반도체, 소프트웨어에서 방위산업에 이르는 산업의 전 분야를 집약적으로 보유한 국가는 전 세계에 얼마 없다. 서울을 중심으로 세 시간 비행거리 안에서 전 세계 반도체와 휴대전화의 압도적 물량이 생산되고,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생태계가 집중돼 있다. 배터리와 반도체는 해외 경제안보의 거점기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을 파트너로 하게 되면 집약된 제조업과 지리적 접근성의 장점을 누릴 수 있다. 그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두 번째의 카드는 문화적 소프트파워의 증가다. 문화적 친밀감은 한국이 보유한 점과 선을 연결하는 데 있어 진입장벽을 낮추고 호감도를 높인다. 콧대 높았던 유럽에서부터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제3 세계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소프트파워를 통해 활용할 공간이 늘어났다. 문화 역량이 경제적·정치적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 번째 카드는 지난 수년간 엑스포 유치를 위해 발로 뛰어다닌 경험이다. 비록 유치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까지 눈으로 보고 수많은 점을 찍고 다녔다.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네트워크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만큼 밑밥을 던져놓았는데 낚싯배를 띄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효가 남아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관계들을 선별해 이어 나가야 한다. 비싼 수업료를 낸 것은 반드시 그 가치가 있다.

동북아 연계할 상상력 발휘해야

하지만 이러한 카드들을 실용외교에 성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과제가 수반된다.

첫 번째 과제는 안전판이 되어줄 동맹과 우방의 확보다. 이미 세계는 다극화된 파트너십으로 묶여가고 있다. 한·미·일 공조체제는 현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외교적 자산이다. 감정의 골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한국 외교의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다자 무대에서 활동 공간을 넓혀주는 치트키다. 외교 일선에서 뛰어본 사람들은 한·일 적대관계가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게 했는지 뼈저리게 안다. 협상력을 가지는 실용외교는 ‘동맹 플러스’로 확대됐을 때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동맹만 보는 것도, 동맹을 경시하는 것도 실용외교의 실패로 귀결된다.

[일러스트=김지윤]
두 번째 과제는 동북아를 연계할 상상력의 발휘다. 일본과 중국은 우방을 따지기 이전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거대 경제권이다. 북한은 숙명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한반도의 절반이다. 핵 억지에는 여전히 동맹이 필요하고, 경제 안보에는 중국이 함께 해야 한다. 이런 한국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자신밖에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은 엄중하지만,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협상력을 역으로 중국과의 경제관계에 투사해야 한다. 산업 차원에서 일본과의 연계 강화는 미국·중국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프랑스는 2차대전 이후에 석탄철강공동체라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유럽통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합리적인 상상력이 발휘되면 실용외교는 힘을 받는다.

민간 외교 역량 강화도 지원하길

세 번째 과제는 극단적 감정과 단순화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파트너를 수시로 바꾸는 무원칙의 실용은 존중받지 못한다. 외교가 정쟁화되고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역으로 경쟁국들이 가장 반기는 상황이다. 한국이라는 중요하면서도 견제해야 하는 나라가 쉽게 분열되고, 쉽게 잊어버리고, 스스로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내심 반길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냉소와 가십의 대상이 되는 외교가 상대에게 존중을 받는 경우는 없다. 때론 포커페이스도 필요하다. 실용외교의 본질은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굳어진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실용외교의 국내적 기반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력한 국내 비토 그룹의 존재는 치밀한 전략이 받쳐준다면 협상력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다. 새로운 국회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정부·의회·학계·기업 간의 소통을 강화하는 초당적 외교 자문기구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외교와 국방은 최고지도자 고유의 권한 영역이지만, 소통의 확대를 통해 정쟁의 대상이 아닌 지속적인 외교전략을 논의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가 있다. 아울러 민간 부문이 보다 주도적으로 움직이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 간 관계로만 풀기에는 국제 관계의 현실은 너무도 복잡하고 엄중하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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