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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년 산책] 종교에 관한 세 철학도의 대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두 제자와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이군이 질문을 꺼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내가 옆자리의 박군에게 “군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박군이 “저는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이군이 “저는 교회에 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저런 얘기를 들으면 반감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목적이 있으면 인간에게 있고 없으면 없지, 존재 여부도 모르는 신(神)에게 있다는 사고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반박했다.

죽음이란 절망 극복하려는 바람
태어날 때부터 인간 삶의 본성
그 가능성에 신앙의 문 두드려

인류 파국 향해간다는 회의 존재
예수의 가르침, 세계사 바꿔놓아
신앙 통해 역사에 희망 갖게 돼

김지윤 기자
내 대답이 어려워졌다. “나도 이군과 같은 사상으로 철학 공부도 했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철학과 인문학의 책임이면서 사명이니까. 이군의 사상적 자세는 타당하다고 믿는다. 인류의 스승인 공자나 석가도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인간은 인간의 한계와 운명을 배제하거나 극복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

박군의 질문이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현재까지 종교는 필요 없었을 텐데, 많은 사람이 왜 종교를 믿습니까.” 내가 신앙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철학 공부를 할 때 인문학도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다. 인간은 인간이다. 그 인간의 본질 속에 인간다움을 완성시키는 의무가 있는데, 육체와 시간 속에 사는 나를 정신과 영원을 찾아 완성시키려는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 인간의 인간다운 본성을 이성과 양심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성적 사고와 양심적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어떤 한계와 종말에 부닥친다. 삶을 위하고 사랑할수록 마주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적 삶의 한계와 종말 의식이다. 정신적 삶을 삼켜버리는 절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극복하고 싶다는 바람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인간적 삶의 본성이다. 그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종교적 신앙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이 철학과 인문학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종교적 신앙은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희망의 가능성이었을 것이고….

인간과 상관없는 신앙 있을 수 없어

이군의 질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존재이고 긴 세월의 역사가 해결지어 줄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런데 인구가 많아질수록 인류의 문제는 해결되기보다 더 해결지을 수 없는 과제를 증폭시켜 왔을 뿐이다. 역사가 길어지면 문화의 축적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 큰 비극과 절망을 안겨 줄 뿐이다. 과학의 발달은 해결의 가능성과 더불어 해결짓기 어려운 문제들을 증대하고 있다. 핵무기의 개발과 발전은 인류의 존폐 문제까지 유발하고 있다. 사회문제는 개인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역사적 희망은 더 큰 절망과 연결되어 간다. 그러니까 인간에 인간을 더해가는 사회나 역사적 시간은 희망을 탄생시키기보다는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파국으로 향해간다는 회의가 커져가고 있다. 말하자면 믿고 따라야 할 진리와 영혼과 정신적 안식처를 스스로 파괴해 가는 잘못을 범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신의 존재나 계시가 필수적이고 종교는 그 해결을 위해 필요했고 태어났다는 뜻입니까?” 박군의 질문이다.

“그렇다고 인간과 상관이 없는 신이나 신앙은 있을 수 없다. 세계사 속에 나타난 유신론을 인격적 실재(實在)로 믿는 종교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어 온 유대교가 그것이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구약은 역사적 종교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자연신이나 철학적 관념의 신이 아닌 역사 신앙의 모체와 발전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구약적 신앙이 예수를 통해 신약적 신앙으로 탄생되었다. 후에는 마호메트의 교훈으로 전개되면서 지금의 이슬람 신앙이 된 것이다. 우리가 공자의 가르침을 윤리와 도덕으로 받아들이고 석가의 교훈을 철학적 법과 진리로 따르는 것은 신의 존재가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으나, 신약을 받아들인 신앙이 오늘의 기독교가 된 것이다. 지금 이군은 그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나 박군은 그 신앙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군은 철학이나 인문학도가 되었기 때문이고 박군은 그 이상의 것을 믿는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신앙을 갖는 것은 인생 최고의 선택

이군이 다시 질문을 꺼냈다. “저도 그런 신이나 가르침이 있다면 믿겠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없는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독교적 신앙의 과제가 있다면 성경 특히 신약을 통해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남겨 주었는가, 찾아보는 일이다. 예수의 교훈에 따라 그렇게 살겠다는 선택이 신앙의 시발이다. 그의 교훈이 내 인생의 진리가 될 수 있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선택을 하고 체험하는 결단이 따라야 한다. 그 신앙적 체험이 내 삶의 중심과 주체가 될 때 신앙인이 된다. 인생의 목적이 새로 나타나며 무엇이 소중한가를 묻는 가치관이 확실해질 때 우리는 신앙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인생의 목적과 삶의 가치관을 갖게 돼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을 때, 사회와 역사의 목표와 방법이 새로워진 것이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철학자 사도 바울이었다. 로마 법정에서 예수와 그의 교훈을 전해 들은 법관은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느냐고 바울을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로마를 비롯한 세계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신앙적 체험을 한 사람은 자연법칙과 질서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가치와 질서의 존귀성을 믿으면서도 신앙적 가치와 은총의 질서를 체험하게 된다. 인간의 영구한 가치와 역사의 무궁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현재의 생활을 영위해 가게 된다. 그 이상의 진리를 찾아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은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되지 않을까….”

대화를 끝낸 우리 셋은 침묵 속에서 자기 반성을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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