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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키우라는 시모…"나쁜 며느리 돼라" 정신과 의사가 깨달은 것 [마흔공부⑤]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의 저자 한성희 이한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을 진료실에서 만났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그의 진료실에는 아이들이 만든 클레이 작품과 교구들이 눈에 띄었다. 강정현 기자

인생이 더는 기대되지 않을 때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메이븐)를 읽었습니다. 서문에 ‘딸아, 나는 너를 죽을 때까지 응원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는데요. 저자는 44년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국제공인 정신분석가인 한성희 의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중년의 위기를 겪는 이 시대 모든 딸에게 위로를 건네는데요. ‘마흔 공부’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는 ‘40대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Part 1. 나쁜 딸이 되어라

Q : 딸을 위한 책을 두 권이나 썼어요. 삶의 지혜를 담은 엄마의 연서로 읽었습니다.
A : 딸이 서른에 결혼하고 미국에 이민 갔거든요. 딸이 가정을 이룬 것은 기쁘지만 저에게는 굉장한 상실이었어요. 저는 어머니한테 ‘깻잎은 뒷면까지 꼼꼼히 씻어야 한다’ 같은 생활 지식을 배웠는데, 딸에게는 하나하나 못 가르쳐줬거든요. 한국에 있으면 들락날락하며 도와줄 텐데, 너무 슬픈 거죠. 그때 마침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써 놓은 글이 있었는데 딸에게 선물한다는 마음으로『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냈어요. 절절한 마음이 전달됐는지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셨죠.


Q : 그렇게 10년이 흘러서 딸이 마흔이 됐군요.
A : 딸의 마흔 생일에 미국에 갔어요. 우리 애도 많이 늙었더라고요. 회사에선 관리자가 되다 보니 책임도 커지고 인간관계도 어렵고 경제적인 고민도 생기고, 인생의 방향이 안 보이는 것 같다고 고민하더라고요. 제가 40대에 했던 고민과 똑같았어요. 그래서 한 번 더 책을 써보자 했던 거죠.

" 딸아. 마흔의 흔들림 앞에서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야말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오느라, 세상이 부여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느라 억눌러 온 너의 욕구들을 돌아볼 때다. 남들이 뭐라든, 네가 하고 싶고, 되고 싶었던 너의 모습들을 찾아보렴.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p.10 "


Q : 원장님도 방황하는 40대를 보냈나요?
A : 제가 마흔을 앞두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는데요. 당시 국립정신병원(현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일했는데, 소아정신과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가장 발목을 잡은 것은 딸아이였어요. 아직 어렸거든요. 남편은 다녀오라고 했는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남편이 안쓰럽다’ ‘지금 유학해서 무엇하냐’ 말렸어요. 그래도 제 마음속에는 ‘앞으로 나아가라’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어요.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나로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남편도 중요하지만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나고 보니 나를 발목 잡던 이유가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웃음)


Q : 60세에 한 번 더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A :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내 인생에 뭔가를 완결한 느낌이 들겠더라고요.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공부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때도 주변에서 말렸어요. 어떤 사람은 저를 ‘자신만의 커리어를 좇아서 남편에게 희생을 강요한 여자’라고 욕도 했어요. 처음에는 화도 났지만, 욕하고 싶으면 해라, 나는 나답게 살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물론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요. 제 선택을 늘 응원해줬거든요. 그래서 양말을 뒤집어 놓아도 아무 말 안 해요. (웃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해보세요. 좀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세요. 나쁜 딸, 나쁜 며느리가 되더라도요.




Q : 나쁜 딸, 나쁜 며느리여도 괜찮을까요?
A : 우울증으로 내원한 환자 중에 육아로 커리어를 포기한 것을 무척 후회한 분이 계셨어요. 시어머니가 ‘직장 다니면 어차피 베이비시터에게 월급 다 줄 거, 집에서 애나 키우지’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 엄마를 보면 “지금 돌아오는 돈이 0원이라도 가능한 한 일을 계속 하라”고 합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는 언젠가 지나가거든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꿈을 포기하는 건 안 된다고 해요.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쁜 며느리가 되고, 친정어머니가 말한다면 나쁜 딸이 되세요. 다른 사람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경력이 단절되더라도 싹을 갖고 있어야 해요. 취미라도 계속해야 해요. 적금을 붓듯이요.
한성희 원장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먼 북소리』를 인용하며, 내면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북소리)이 무엇인지 잘 듣는 것 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Part 2. 탈(脫) 환상이 필요한 나이
40대에 접어들어 ‘중년의 위기’를 겪는 분이 많습니다.
A : 40대는 삶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되는 나이에요. 기회, 시간, 건강에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체력도 달리고 주름도 생기고 흰 머리도 나고. 언제까지 젊고 건강할 수 없구나. 그러면서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거대한 자아 이상을 떠나보내는 거죠. 어린아이들은 환상 속에 살잖아요. 예를 들어 동화의 결말은 항상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지만 어른이 되어 결혼해보면 알잖아요. 뭐가 행복해요? 그때부터 시작인 건데. (웃음)


Q : 꼭 환상을 떠나보내야 할까요?
A :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너무 크면 인생이 힘들어요. 아무리 채워도 외롭고 불안하거든요. 1000억 부동산 부자를 꿈꾸는데 현실은 월세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인가요? 어떤 모습이라도 내 인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어요. 과도하게 이상적인 자아상에 매몰되면 우울·불안·강박·자기 학대까지 이어질 수 있어요. 건강한 탈(脫) 환상은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의 ‘나’를 받아들이는 거예요. 현실이 마음 같지 않더라도 꿈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거죠. 40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며 지혜로워질 수 있는 나이에요.

" 딸아, 나는 네게 ‘너는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다’는 말을 충분히 해 주었을까? 너를 더 지지해 줬어야 했는데,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무엇을 느끼든 그 자체로 옳다고 이야기해줬어야 했는데, 남들이 뭐라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가라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p.310 "


Q : 정신분석학적으로 40대는 어떤 나이인가요?
A : 미국 정신분석가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 40대는 ‘생산성’의 시기에요. 생산 능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나이니까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어요. 젊을 때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아도 되죠. 40대는 ‘인생의 배’를 키워야 하는 시기입니다. 배를 키워서 부모, 배우자, 자녀도 태우고, 회사원이라면 팀원도 태우고요.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죠.


Q :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네요.
A : 이 시기도 영원하진 않아요. 내 배에 올라탄 것들도 곧 떠나요. 아이들도 금세 부모 품을 떠나고요. 책임질 일도 줄어요. 생산성의 시기가 지나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모든 걸 수용하는 시기로 접어들어요. 지나고 보니 40대는 부모 노릇, 자식 노릇, 밥벌이로 힘들긴 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풍성한 시기에요. 지난한 과정에서도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면 좋겠어요.

✅Part 3.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Q : 이 시대에 ‘좋은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A : ‘좋은 어른’은 없어요. 되려고 노력할 뿐. 누구나 나이 먹으면 어른이 되죠.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에요. ‘어른 아이’ 얼마나 많아요. 평생 숙제에요. 누군가 힘들 때 지푸라기라도 되어줄 사람, 후배들 앞길을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어른’ 아닐까요.

" 딸아, 몸만 컸다고 어른이 아니다.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약하고 여린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감싸 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가슴에 맺힌 게 없는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p.151 "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요. 할머니가 되어도 행복할까요?
A : 저는 ‘요즘 더 행복하다’는 말을 책에 썼어요. 물론 20대의 젊고 생기 있는 피부는 안 돌아와요. 그런데도 지금이 더 좋거든요. 60대는 60대만의 즐거움, 70대는 70대만의 즐거움을 조물주가 숨겨 놓았다고 생각해요. 젊음만이 즐겁고 행복하냐? 아뇨. 오히려 젊을 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역설적으로 더 힘들어요. 노년이 되면 어느 정도 인생이 결정돼 있어요. 제 친구들은 요즘에 점도 안 보러 다닌다고 그러더라고요. 젊었을 땐 많이 봤거든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결혼을 해야 할지 궁금하니까요. 이제는 사주 볼 일이 다 끝났어요. (웃음)
한성희 원장은 삶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가지치기’를 강조했다. 마흔에 ‘중년의 위기’로 힘들었지만, 덕분에 인생에서 중요치 않은 일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강정현 기자


Q :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나이들 수 있을까요?
A : ‘가지치기’하세요.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뭔가요. 거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세요. 사람이 얼마나 우매한지 젊을 땐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늙고, 언젠가 죽어요. 글 쓰는 분들은 공감하실 텐데요. 마감이 없으면 책도 논문도 정말 오래 걸리죠. 그래서 저는 시간이 없을 때 항상 마지막 페이지, 결론부터 써요. 그러면 메시지가 명료해지거든요. 글 쓰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자체도 그래요. 우리 삶도 결국 마지막이 있음을 알게 되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죠. 지금 삶에서 조금만 줌 아웃 해서, 죽음의 시점에서 내 삶을 보세요. 그러면 내 삶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쓸데없는 걱정·불안도 줄고요. 멀리 보세요.


김연지(kim.yeonji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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