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페루 여행기 1
길을 떠나 집으로 돌아와 여행 가방을 풀어헤치니 스카프에서, 양말에서, 입었던 옷가지에서 반짝이는 하얀 모래가 떨어진다. 장엄한 안데스 산맥을 바라보며 사막을 지나 아마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따라 페루를 돌고 온 며칠의 꿈 같이 지나간 날들이 아른거린다.“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울림 깊은 말을 가슴에 안고 떠난 여행, 나는 가보지 못한 그 세계에서 과연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안고 나에게 도착할 것인가. 이 여행이 나에게 주는 삶의 보석 같은 숨은 메시지는 과연 또 무엇일까. 자못 궁금해하며 떠난, 페루 여행, 벌써, 기억되어버린 어제를 떠올리며 페루에서의 시간을 돌이켜본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리마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도착한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보라색 감자 꽃이 핀 들녘, 낮은 담장, 흙길, 돌담, 데자뷔(언젠가 와 본 듯한 느낌) 마치 강원도 나의 고향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푸근함이 온몸에 감돈다.
알파카 양털을 뽑아내어 선인장이나 검은 옥수수, 온갖 산과 들의 자연을 채취하여 염색으로 곱게 우려낸 빨강, 파랑, 초록, 분홍 색색이 어우러진 망토와 치마를 입고 모자를 쓴 길가의 작은 키의 여인들을 바라본다.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는 그들의 순수함에 젖어 들며 푸른 하늘 아래 라마와 알파카를 기르며 소박하게 살았을 고대 잉카인들을 떠올려본다.
켜켜이 바람에 날아간 세월을 더듬으며 잉카의 유적지를 따라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해안, 정글 고산 지대 다양한 기후를 가진 페루의 음식은 어떨까 궁금했던 나에게 붉은 도자기 접시에 담아져 나온 마늘 수프와 새콤매콤한 세비체의 맛은 기대 이상이었다. 손톱만 한 보라색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꽃들의 정원 같은 호텔에서 맛난 식사와 숙면을 취하고 다음날, 페루 국토의 60%가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정글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놀라며 굽이굽이 흐르는 우루밤바 강물을 바라보며 마추픽추를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산허리를 도는 기차의 꼬리를 바라보며 나는 몇 번이나 나 자신에게 지금, 페루의 땅, 이 순간, 아마존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스스로 속삭이며 현실감의 설렘을 최고조로 끌고 와 다시 흥분하며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곤 하였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깎아지른 아찔한 절벽 길을 꼬불꼬불 돌아 도착한 마추픽추, 세상에나! 산꼭대기 위에 펼쳐진 잉카문명의 고대 도시 내 눈 앞에 펼쳐진 마추픽추는 아름다운 한 폭의 예술품이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 절벽의 다채로운 색, 수백 개가 넘는 계단식 밭들, 시계, 태양의 신전, 돌로 만들어진 창문과 탑과 안데스 산맥의 빙하를 녹여 수로를 만든 고대 잉카 문명인의 지혜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불가사의한, 신비와 아름다움 앞에 서 있는 나는 그저 경이로움과 놀라움에 압도되어 탄성을 터트렸다.
이 신비의 평화로운 땅도 스페인 침탈의 칼날과 전염병에 스러져 쇠퇴하고 말았다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울하다. 세계는 어디를 가보아도 피의 역사다. 땅따먹기에 굶주린 인간의 야욕과 만행에 환멸과 슬픔이 보인다.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팬플룻을 부르는 악사들, 이 땅에 도착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노래, 페루의 민요, 엘 콘도르 파사, 어려서는 그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색과 날아가는 철새의 노스탤지어에 빠져 좋아하던 노래가 피사로의 칼날에 사지가 찢겨 죽어간 잉카 영웅이 죽어 콘도르 새로 부활한다는 뼛속 깊은 슬픔을 안은 페루인의 희망의 노래 노래였다니……. 마추픽추 돌담을 걸어 석문을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보니 높은 하늘 위에 독수리 한 마리 빙빙 날고 있다. 전쟁도, 살인도, 희생도 없는 세상은 영원한 꿈일까. 엘 콘도르 파사!, 처연하게 아름다운 가락이 바람에 날려 공중에 흩어진다!
곽애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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