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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천년을 빌려준다면

황주리 화가
설날 어머니가 보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 이런 노랫말이 귀에 꽂혔다. “만약에 하늘이 천년을 빌려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긴 삶의 길이가 천년인 모양이다. 학 천 마리를 접어 소원을 빌고, 천년 고찰을 찾아가고, 천년초를 먹고, 천년 지기와 함께하는, 천년이라는 삶의 길이를 생각한다. 천년이라 한들 급류에 휩쓸려 가는 기분인, 이런 속도로는 그것도 금방 갈 것만 같다.

삶도 역사도 되풀이되는 것
천년 지나도 목적지 도달못해
이데올로기 전쟁은 부질없어

그림=황주리
누군가와 가깝다는 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가까웠던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는 건 시간이 아까워진 탓이다. 쓸데없는 인연들과 낭비한 시간들이 아까워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교과목에 시간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시간이 낭비인지 아닌지 구분할 지혜는 그 많은 시간들을 다 낭비한 뒤에야 얻게 된다.



황혼 이혼을 하는 사람들의 모래성 같은 시간을 생각한다. 오래된 영화 ‘중경삼림’에서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만년으로 하자.’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어차피 시간은 상징이다. 우리는 그저 유효기간만 알고 살면 된다. 하지만 그걸 알고 사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갖가지 색깔의 약병들과 식료품들과 관계의 유효기간, 권력의 유효기간, 우정과 사랑의 유효기간, 염색의 유효기간, 목숨의 유효기간. 유효기간을 제대로 알고 떠난 지혜로운 인간은 역사상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던 나폴레옹이나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반된 말이나 사실 같은 말이다.

나는 인상 깊었던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거의 기억나지 않는 장면들의 신선함에 놀란다. 어쩌면 같은 삶을 두 번 살아봐도 이런 기분일지 모른다. 거의 기억나지 않아 처음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내용과 결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저 따뜻했다거나 풍광이 아름답거나 배우의 표정과 대사가 인상적이었다는 희미한 분위기만 기억할 뿐이다.

독서도 여행도 결혼도 이혼도 다 그럴지 모른다, 삶과 죽음까지도. 사실 개인적으로도 태어났기 때문에 계속 사는 것이고, 그림을 이미 너무 많이 그려서 계속 그리는 거다. 우리 모두의 삶이, 되풀이되는 인간의 역사가, 산 위로 돌을 밀어 올렸다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끝없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아닐 수 없다.

무슨 영화에서인가 졸다가 갑자기 깬 적이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고 살아있는 게 유감이다.” 바로 이 대사였던 것 같다.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살아있는 게 유감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영웅들이 이런 고독을 감당했을까? 어릴 적 나는 늘 전쟁이 무서웠다. 전쟁 때 폭격을 당해 아기인 줄 알고 베개를 안고 뛰쳐나온 여인의 이야기를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던 여섯 살 어린 동생이 김대중 후보가 선거에 나온 해에 벽에 붙은 김대중 후보의 포스터의 얼굴의 입을 지우거나 눈동자를 지우고 다녔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하면 네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단다.” 미래에는 도대체 누가 대통령이 되고 싶을 것인가? 우리들의 대통령은 다 훌륭했고, 무언가는 잘못했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지고 떠난 그분들께 감사한다. 천년이 지나도 우리는 영원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세상은 없고 이것을 얻으면 저것을 잃는 게 게임의 법칙이니까.

문득 어제 본 영화 ‘건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독백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게 서 있는 것일까?” 천년에 비하면 너무 짧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 어릴 적 우표 수집광이던 나는 우표를 새로 수집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표 수집 앨범에서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인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기념 우표를 찾았다. 오래된 우표를 보면서 왜 우리는 대한민국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그분을 역사 속의 희미한 그림자로 남겨두었을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부질없는 이데올로기 전쟁 중이다. 자본의 이데올로기만 통용되는, 이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 진짜 공산주의자는 다 죽고 없고 껍데기만 남은 세상에. 백 년을 감당하기도 힘든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면, 나는 너무 벅차 지구 밖으로 도망갈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누군가가 “반장이 너무 무능합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잠 못 이루던 그날처럼.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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