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웠다" 덕후들 난리…당근 뜨면 '순삭' K빈티지 뭐길래 [비크닉]
얼마 전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재미있는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어요. 닉네임 ‘보루네오 덕후’가 올린 ‘보루네오 트롤리 삽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죠. 네, 맞아요. 옛날 집집이 하나씩은 있었던 바로 그 보루네오 가구요.요즘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1980~90년대 보루네오 가구 매물은 올라오자마자 ‘순삭(순식간에 삭제)’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어요. 붉은빛이 도는 티크 원목 가구로 책상이나 서랍장 등이 대부분인데요, 최근 나오는 신제품과는 다른 풍모에 입소문이 나면서죠. 언뜻 물 건너온 북유럽 빈티지 가구 같은 세련된 느낌도 있는데, 한 편으로는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한국적인 멋도 풍기죠.
오늘 비크닉은 빈티지 가구 시장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는 ‘코리안 빈티지’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작품처럼 거래되는 고가 빈티지 가구뿐만 아니라 이케아 같은 대중 브랜드에서도 복각 가구를 내는 등 빈티지 가구의 대중화 움직임도 곁들여서요.
4만 원짜리 2인 식탁 세트, 보물이 되다
장윤정 씨는 홍익대와 일본 무사시노 미술 대학에서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뒤 일본 목가구 브랜드 ‘칸디 하우스’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는 잔뼈 굵은 가구인(人)이에요. 그의 매운 눈에도 들 만큼 옛 보루네오 가구의 매력은 특별하다고 해요.
현재 스튜디오 호미에는 이겨온 세월이 모두 다른 보루네오 책장 두 점과 책상, 서랍장과 식탁이 마치 한 세트처럼 자리하고 있죠. 장 씨는 “플라스틱 시트지를 바르는 요즘 가구와 달리 원목을 사과 깎듯 1mm 두께로 돌려 깎아서 합판에 둘러 만든 제대로 된 가구”라며 “디자인도 미국 청교도 시대 셰이커 가구의 미학을 계승한 듯 절제됐다”고 극찬했어요. 그러면서 “1980~90년대 보루네오에 디자이너만 100여명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요즘 국내서도 비싸게 팔리는 북유럽 가구 못지않은 만듦새”라고 귀띔했죠.
스튜디오 호미에서는 보루네오 외에도 비슷한 시기를 호령했던 옛 바로크가구·삼익 가구도 한두 점 볼 수 있었어요. 대부분 헐값에 내놓거나, 심지어 아파트 단지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던 가구를 가져온 경우도 있었죠. 장 씨는 “무엇보다 수입 가구와 달리 한국인 체형에 딱 맞아 편안하다”며 “IMF 이후 국내 가구 업체들이 생산 시설을 국외로 돌리면서 이런 품질과 디자인의 가구가 더는 안 나온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어요.
한국의 미드 센트리 모던?
이후 1980년대 식탁과 화장대 거울, 1990년에 사무용 가구로 출시된 회의실 의자와 식탁 의자, 1989년의 하이그로시 바 트롤리 등 보루네오 가구들을 수 점 들였어요. 보통 친구들이 거주지 근처의 중고 플랫폼에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주는 식으로 수소문했죠.
채아영씨가 보는 보루네오 가구의 매력은 ‘혁신성’이에요. 1980년대 보루네오에서 출시된 티크 가구들이 1960~70년대 북유럽 스타일의 가구를 어느 정도 모방했다면, 1980년대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가구 디자인을 선보였죠. 당시 밀라노에 디자인 사무실을 열고, 이탈리아 멤피스 그룹의 영향을 받은 하이그로시 가구를 생산했는데, 가구에 나무색이 아닌 민트·연핑크·검정 같은 색을 넣는 시도는 한국 가구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혁신적이었으니까요.
풍요의 시대가 그리워
옛 가구에 대한 관심을 타고 최근에는 ‘코리안 빈티지’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요. 당근마켓·번개장터 같은 중고 플랫폼의 활성화가 한 배경으로 꼽히는데요, ‘보루네오’ ‘삼익가구’ ‘리바트’ 등 1980~90년대를 호령했던 한국 가구들이 주인공이죠. 외에도 ‘행남자기(행남사)’에서 출시된 1990년대 그릇들도 거래가 활발해요.
미드 센트리 모던과 코리안 빈티지의 공통점 발견하셨나요? 맞아요. 둘 다 풍요의 시대죠. 1950~60년대 미국은 1·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산업과 문화에 팽창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어요.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고 본격 핵가족 시대를 맞이하면서 건축 붐, 디자인 붐이 일어났죠. 군수 물자를 만들었던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어냈고 이 물건들은 집으로, 생활로 들어갔어요.
빈티지 가구를 주로 취급하는 디자인 갤러리 앤더슨씨의 앤더슨 초이 대표는 이 시기를 두고 “돌아볼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말해요. “급변하는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디자인이라는 큰 기준 아래 절제의 미학을 최대로 끌어올린 범용적이며 영향력 있는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죠.
한국의 1970~80년대도 비슷해요.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 부머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들던, 경제·산업·문화의 팽창기죠. 보루네오·리바트·삼익가구 같은 한국의 가구들은 당시 중산층의 새로운 주거지로 부상한 아파트와 2층 양옥에 두루 어울리는 모던한 가구들을 만들어냈어요.
그 이후로 40여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당시 디자인이 이렇게 좋았나?’ 새삼 놀랍습니다. 앤더슨 초이 대표는 이런 한국 빈티지 가구들을 두고 “좋은 나무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요즘에 비해 결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나무로 잘 만들어진 가구들”이라며 “빈티지의 경우 보통 40년은 지나야 한다는 게 통념이니 1980년대 초반 가구들은 그 반열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술 작품 급에서 이케아까지
옛 시대를 풍미했던 빈티지 가구의 인기는 개성 있는 가구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만들어진 현상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쉬운 새것’보다, 구하기 어렵고 희소한 ‘옛것’에 대한 선호죠. 한편으론,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마들렌 굽는 냄새’처럼 행복했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기도 해요. 거의 10여년 간 한국 사회 문화사를 장식하고 있는 ‘복고 현상’이 가구로 표현된 셈이죠.
발견의 재미 누려볼 때
다만 과거의 유산(아카이브)을 되짚어가는 현상은 아마도 한동안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지금, 우리의 지금을 만든 수많은 어제에 대한 탐구가 이어질 테니까요. 수입된 해외의 것만이 좋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좋은 것,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우선은 ‘발견의 재미’를 누려볼 때입니다. 와인에만 국한됐던 시간의 가치가 패션·가구 등 라이프 스타일 전반으로 확장하는 지금, 과거의 재미난 것들을 되짚어가며 새로운 발견을 해보길 바랍니다. 혹시 아나요,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에서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힌트를 얻게 될지도요.
유지연(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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