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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비스트’도 ‘아우르스’도 못말렸다…김정은의 벤츠 사랑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 2018년 6월 12일 오후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산책 도중 육중한 외관 때문에 ‘비스트(Beast·야수)’라는 별칭을 가진 미국 대통령 전용 리무진 차량(캐딜락 원)으로 김 위원장을 안내했다. 백악관 경호원이 차량의 뒷문을 열었고, 김 위원장은 차량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허리를 굽혀 내부를 들여다보며 관심을 보였다.

# 지난해 9월 13일 오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북·러 정상회담을 마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자신의 전용차 아우루스 뒷좌석에 함께 앉아 차량과 관련한 대화를 나눴다. 러시아판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아우르스는 설계와 제작비만 1700억원이 투입된 러시아 최고급 차량이다.

김정은 미·러 대통령 전용차 관심
신형 벤츠 세단·SUV 타고 등장
간부·공로자들 선물도 벤츠
차 세탁으로 제재 무력화 과시

두 차량 모두 방탄 설비를 갖춰 어지간한 폭탄이나 화학무기의 공격을 견디고, 타이어가 손상돼도 시속 80㎞ 이상의 속력으로 운행이 가능토록 제작됐다. 북한의 차량제작 능력은 걸음마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신변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김 위원장은 미국이나 러시아 대통령의 전용 차량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데 김 위원장의 선택은 벤츠였다. 북한 매체는 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세단 위의 세단’으로 불리는 벤츠 마이바흐 S650에서, 그리고 지난달엔 신형 벤츠 마이바흐 GLS600 SUV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을 공개했다.

포드 마니아 김일성

북한이 지난달 15일 공개한 기록영화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형 벤츠 마이바흐 SUV에서 내려 영접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줄곧 미국을 배척의 대상으로 여겼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미제’(미 제국주의)라거나 ‘승냥이’라고 하면서 ‘상종해선 안 될 존재’로 선전했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장의 조부이자 북한이 ‘사회주의 시조’이자 ‘영원한 수령’으로 여기는 김일성 주석은 생전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자회사 링컨에서 제작한 콘티넨털(링컨)을 애마로 사용했다. 김일성은 이 차를 타고 흙길을 달려 현지지도를 다녔고, 1994년 7월 사망했을 때 운구차도 링컨이었다. 당시 북한이 『화보 조선』 등을 통해 공개한 영결식 장면에 벤츠는 없었지만 링컨 차량 여러 대가 동원됐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직후 옛소련의 스탈린이 선물한 지스(ZIS) 3HC 리무진을 전용차로 사용했다. 6·25 전쟁 때 북진했던 국군은 청천강 인근에서 이를 발견해 노획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미8군 사령관 월턴 해리스 워커 장군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에게 선물했다(이후 82년 환수). 스탈린에 이어 말렌코프, 불가닌 등 옛소련 지도자는 김일성에게 ‘짐’ 승용차를 선물했고, 한동안 김일성의 발 노릇을 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 태양궁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그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곳엔 벤츠 S600(12기통)만 가져다 놨다. 이 벤츠는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이 선물했다는 얘기도 있다. 김 위원장의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유명한 스피드광이다.

벤츠 사랑꾼 김정일, 마지막 길은 링컨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담긴 관을 실은 링컨 콘티넨털. [중앙포토]
차량 운행이 거의 없는 북한 고속도로는 그의 레이싱 코스였다. 스포츠카를 타고 속도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98년 11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최고급 승용차였던 다이너스티를 선물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70년대부터 벤츠 또는 마이바흐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중국이나 러시아를 방문할 때도 그랬다. 고위 간부나 국제 대회에서 마라톤 선수 정성옥에게 부상으로 벤츠를 주고, 모란봉악단원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제공한 버스도 벤츠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항공편으로 평양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전 차량으로 구형 링컨을 제공했다. 북한이 보유한 벤츠가 방탄과 첨단 장비를 구비한 청와대의 벤츠보다 구형이어서 체면상 기존 의전용 차량을 이용했을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벤츠 사랑꾼인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운구차는 링컨이었다. 김일성을 연상시켜 김 위원장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김일성보다 좋은 차량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자동차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집권 직후 마이바흐 S600 풀만 가드와 마이바흐 S62를 구입해 이용했다. 수시로 SUV도 교체하며 탄다. 수해 현장이나 험지를 찾을 땐 영국산 랜드로버(2016년)나 일본의 렉서스(2018·2020년) SUV를 이용했지만 최근엔 평양 시내에서도 SUV에서 내리는 모습이 목격되곤 한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자동차 수출을 금지하는 대북제재를 내렸다. 정상적인 신차 구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 지난해 12월 일본의 수출회사가 북한에 렉서스 차량을 수출하려다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컨테이너에 몰래 숨겨 운송하려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보란 듯이 세단과 SUV 신형을 타고 등장한다. 차를 좋아하는 그가 수시로 종류를 바꾸면서 제재를 뚫고 ‘차 세탁’에 성공했다는 점을 과시하는 차원일 수도 있다. 서방 사회가 아무리 제재를 해도 사치성 물품을 수입해 소비할 수 있다는 일종의 어깃장이다. 자신이 착용하는 시계는 물론 부인이나 딸에게 명품을 입혀 등장시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생각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북한은 반세기도 훨씬 전인 58년 ‘승리’라는 이름의 2t짜리 화물차를 생산했다. 같은 해 ‘천리마·28호’라는 트랙터 시제품을 내놓는 등 한국보다 트랙터 생산도 빨랐다(한국은 68년).

김정은이 벤츠를 사랑하듯 북한 주민들은 북한에서 생산한 차량이라도 타봤으면 하는 바람일 거다. 지난해 북한은 군수공장에서 제작한 농기계 수 천개를 농장에 보낸 일이 있다. 핵과 미사일 개발과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동차 생산에 투입한다면 북한산 자동차를 타고 싶어하는 주민들의 꿈을 실현하는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정용수(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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