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의 아버지, 시대가 낳았고 시대가 죽였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다크 나이트’ 3부작, ‘인셉션’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열두 번째 작품 ‘오펜하이머’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천재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세계 최초의 핵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이야기에 놀란 감독은 왜 프로메테우스를 소환했을까.
‘먼저 생각하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접두사 ‘pro~’의 기원일지도 모를, 프로메테우스는 선지자를 뜻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계략에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로 하여금 아내로 맞이하게 한다. 인류는 불을 선물 받았지만 ‘판도라의 상자’라는 재앙을 감수해야 했다.
오펜하이머스가 개발한 핵무기는 전쟁을 끝내고 인류 평화를 위함이 동기였다. 그러나 핵은 오늘 날 인류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오펜하이머를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한 감독의 의도가 보인다.
오펜하이머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요 한 과학자의 삶에 대한 전기 영화지만 ‘시간과 사유의 매스터’ 크리스토퍼 놀런의 작품답게 오펜하이머의 삶에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대입, 스토리를 세밀하게 심화한다.
영화는 세상을 영원히 바꾼 원자폭탄, 폭발 그리고 파괴의 불가분의 관계를 파고 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러나 오히려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천재의 고민, 그가 품었던 의구심 그리고 몰락에 관한 탐구적 서사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실험을 이어간다. 숱한 실험을 이어가는 동안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나치는 붕괴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내놔야 한다는 강박에서 시작됐다. 목표인 나치는 사라져버렸다. 대량 살상용 무기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와중에 일본과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항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폭탄의 대상이 바뀐다. 실험은 계속되며 드디어 완성된 폭탄은 ‘폭발 실험’으로 이어진다. 치욕의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과 함께 소련 등 경쟁 강대국에게 이제 누가 세계 최강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장엄하게 22만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그러나 미국이 아닌,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암울한 결과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핵폭탄이었지만, 제3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음에 오늘날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원폭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비유될 만큼 인류에게 반갑기만 한 선물은 아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2차 대전 승전 영웅이 된 오펜하이머, 자신의 천재성과 명성에 취해있던 그였지만 이후 매카시즘 그리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원자력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복수심에 휘말려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삶은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원자폭탄에 이어 더 무서운 수소폭탄이 개발되고, 그와 알력을 빚던 스트로스가 새로운 별로 각광받는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별은 영원히 빛날 수 없다. 폭탄은 폭발과 동시에 그 쓰임을 잃는다. 쓰임을 다한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이제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추앙의 대상이던 그를 몰아내기 위해 청문회가 시작된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청문회 과정에서 자신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대하여 대응하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 때문이다. 자신이 개발한 핵이 인류의 미래에 미칠 결과에 대한 죄책감.
이는 죄책감 따위는 없었던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내면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프로메테우스는 3만년 후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출되며 제우스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신화와 달리 오펜하이머와 그의 가족의 삶은 불행하게 막을 내린다. 오펜하이머는 원자력계에서 퇴출당하면서 명예를 잃고 62세에 후두암으로, 그리고 5년 후 아내 키티도 폐색전증으로 사망한다. 딸 또한 아버지로 인한 사회적 연좌제에 시달려 32세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 말미, 얘기를 나누고 있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을 향해 멀리서 스트로스가 다가온다. 그는 또 하나의 중성자다. 이들의 충돌, 분노와 갈등, 혐오가 ‘파괴와 파멸’이라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갈등의 피로와 감정들이 곳곳에 부유한다. 상처의 부정적 에너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고통과 비극은 이후 냉전 체제로 이어진다. 감정에서 비롯된 충돌은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씨앗으로 남아 지금 이 순간도 성장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지구 전체의 파멸을 불러일으킬 폭발에 대한 경고다.
김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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