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지옥가면 부자된다"…은행 직원들의 '천하제일 횡령대회'
11일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 이원범·한기수·남우현)는 2012~2020년 우리은행에서 총 707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전직 우리은행 직원 A(45)씨와 공범이자 친동생인 B(43)씨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1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는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직원으로 일하며 동생과 회사자금 수백억원은 횡령했고 범행 정황도 좋지 않아 엄중한 선고가 불가피하다”며 1인당 332억700여만원씩을 추징하되 이중 50억4000여만원은 공동으로 추징할 것을 명령했다.2022년 말 기소된 우리은행 횡령 사건은 범행 규모나 기간 면에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역시 1년 만에 무색해졌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범행 기간 15년(2008~2022년) 동안 총 3089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남은행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담당 직원 C(52)씨 등을 기소하면서다. 이 사건은 앞서 주요 은행 횡령 사건들의 범행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는 ‘착시효과’까지 일으켰다. 2011~2022년 강릉 새마을금고 횡령사건(129억원), 2015~2021년 KB저축은행 횡령사건(94억원) 등 연이어 은행권 횡령사건이 터지자 인터넷상엔 ‘천하제일 횡령대회’라는 순위표까지 돌기 시작했다.
①내 고객 나만 아는 폐쇄적 영업에 15년 ‘제자리 근무’
은행에서 이처럼 장기간·대규모 횡령 사건들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적에 목을 맨 폐쇄적인 영업방식에 더해 은행 내부의 안전장치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남은행 사건의 경우 부동산 PF 업무를 맡은 C씨가 시행사의 통장을 보관하면서 인감도장을 위조해 대출금이나 대출원리금 상환자금을 빼돌리는 식으로 횡령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는 범행을 위해 출금전표를 허위로 꾸미거나 시행사가 요청한 적이 없는 데도 허위문서를 작성해 불필요한 대출을 일으켜 대출금을 횡령하는 방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경남은행 사건 수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횡령 발생 이후 은행 직원들이 수습을 해야 하는데, 시행사 전화번호 등 C씨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고객 정보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더라”며 “개별 직원 단위로 실적이 관리되다 보니 그외 직원들뿐만 아니라 관리자조차 사업 내용 등에 대해 중복 확인하지 않는 구조”라고 했다. C씨의 고교 동창이자 공범인 D(53)씨가 C씨가 위조한 문서를 들고 여러 개의 시행사 직원으로 가장해 은행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전화번호나 이름이 똑같은 데도 직원들은 수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은행 내부 안전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경남은행은 C씨가 15년간 같은 부서에서 PF 대출 업무를 담당하게 했고, 이 기간 명령휴가(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은 업무를 수행하는 임직원에게 불시에 휴가를 명령하는 제도)도 실시하지 않았다. “만약 C씨가 명령휴가를 떠났더라면 다른 직원이 업무를 대신 맡아 하면서 횡령 정황을 포착했을 수 있었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또 C씨가 취급한 PF대출에 대해 사후관리 업무까지 수행하는 등 직무 분리도 이뤄지지 않았다.
② 횡령액 투자할 때도 잠잔 증권사 경보장치
은행 돈을 횡령한 직원들은 대체로 차명으로 증권계좌를 개설해 투자하거나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돈을 입·출금하는데, 이 과정에선 증권사도 ‘횡령 방조’에 한몫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거래 중인 재산이 불법이라고 의심할만한 합당한 근거 등이 있을 때 관련 내용을 금융당국에 보고해야 하는 의심거래보고제도(STR)와 현금으로 하루 1000만원 이상 입출금할 때 보고해야 하는 고액현금거래보고제도(CTR)가 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횡령한 돈을 통해 대규모 투자를 하면 증권사나 직원이 그만큼 실적과 수수료도 많이 챙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의심이 가도 이를 모른 척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워서다.
실제 우리은행 횡령사건에서 A씨의 차명계좌 관리를 맡은 증권사 직원 E(43)씨는 A씨의 차명 증권계좌 11개를 개설해주거나 사전교육 및 모의투자를 대행해주고 차명 계좌를 통해 주식을 대신 매수해주는 등 범행을 도운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A씨는 차명 계좌 개설 대가로 1억원을 챙기는 한편, A씨를 VVIP 고객으로 관리하며 회사에서 수억원의 성과급을 받기도 했다.
③ 내부처벌로 끝나는 사이 30배 뛴 횡령액
솜방망이 처벌도 지적된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에서 2019년 1월~2023년 9월 발생한 횡령 사건은 모두 63건이지만 이 중 16건은 형사 고발되지 않고 자체 징계 처리로 끝났다.
내부통제와 ‘엄벌’이 잠자는 사이 은행권 횡령액은 2017년 20억원에서 지난해 7월 기준 578억원으로 28.9배 뛰었다. 지난해 통계에서 경남은행 횡령 액수가 일부만 포함된 데다 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권 횡령액도 빠진 점을 고려하면 ‘횡령 급증’은 전반적인 추세란 의미다.
금융당국, ‘직접제재’ 시동…“금융사 직원 재산도 공개해야”
지난해 롯데카드 105억원 횡령 사건 등 금융·투자업계 전반으로 횡령이 확산하자 국회와 정부는 금융당국이 직접 임직원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단속 강화에 나섰다. 강훈식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에 따르면 ‘여신전문금융회사의 임직원은 직무와 관련하여 직접 또는 간접을 불문하고 횡령, 배임, 증여, 그 밖에 뇌물의 수수, 요구 또는 약속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조항이 신설되고 이 경우 금융당국이 직접 행정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금감원은 지난해 10월부터 ‘금융투자 부문 검사체계 개편안’을 실시하고 대규모 횡령·배임은 1회 위반에도 즉시 등록 취소하도록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을 손질하기로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경남은행 사건만 해도 피고인이 가족에게 월세 수천만 원대의 고급 오피스텔에 거주하도록 하는 등 가족이 범죄수익 사용·은닉에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금융회사 임직원도 공무원에 준해 재산을 공개하는 방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은행 사건의 경우도 피고인이 15년을 살고 나면 50대 후반부터는 숨겨둔 횡령 재산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며 “잠시 지옥 가면 ‘남는 장사’가 되지 않게 더 엄중한 형량이 선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허정원(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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