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수백명 횡령 누명 씌운 '우체국 오심'...수낵 "일괄 무효"
영국 리시 수낵 총리가 이른바 '우체국 스캔들' 피해자들의 유죄 판결을 일괄 무효 처리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10일(현지시간) 밝혔다. 이 스캔들은 수년 전 우체국의 회계 프로그램 오류로 인해 종사자 수백 명이 횡령 누명을 쓴 사건을 말한다. 최근 이 실화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영국 사회에선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이날 텔레그래프·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수낵 총리는 특별법을 마련해 올해 안에 피해자를 구제하겠다고 했다. 무죄 서약을 하는 피해자 개개인에 보상금으로 최소 60만 파운드(약 10억원)를 주겠다고도 했다.
수낵 총리는 이 사건을 "영국 역사상 최대 오심 중 하나"라고 규정하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삶이 무너졌다. 피해자들은 보상받고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이처럼 판결을 일괄 무효로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조치"라고 평했다.
이 사건의 시작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우체국은 일본 기업 후지쓰의 회계 프로그램 '호라이즌'을 도입했다. 민영 우체국 지점들의 금융 거래를 관리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실제 거래 대금보다 수만 파운드가 부족하게 표시되는
오류가 계속 발견됐다. 일선 지점들에선 문제 제기를 했으나 우체국 측은 점장이 돈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조사를 벌였다.
결국 1999~2015년 우체국 점장 등 700여 명이 횡령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웨일스 지역의 점장이었던 앨런 베이츠 등 555명이 집단 소송을 냈다.
2019년 법원은 문제의 회계 공백이 후지쓰의 회계 프로그램 오류 때문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앞서 나온 법원의 판결으로 인해 이미 수백 명이 교도소에서 복역했거나 파산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최소 4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피해 구제는 지지부진해 유죄 판결이 번복된 사람은 93명뿐이었다.
이 사건은 최근 영국 지상파 방송 iTV의 4부작 드라마 '베이츠 대 우체국'이 큰 인기를 얻으며 재조명됐다. 베이츠가 누명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의 방영을 계기로 피해자 구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우체국장을 역임하며 사건을 무마·축소했다는 의혹을 받는 폴라 벤넬스에 대한 문책 요구도 나왔다. 그는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었는데 이를 박탈해야 한다는 내용의 온라인 청원에 약 100만 명이 참여하자 스스로 훈장을 반납했다. 반면 피해자들의 투쟁을 이끈 베이츠는 영국에서 '영웅'으로 불리며 그에게 기사 작위를 줘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영국 정부의 이번 결정과 관련해 베이츠는 더 타임스에 "이제야 적절한 조치가 내려졌다"며 환영했다. 피해자들 편에 서서 싸운 제임스 아버스낫 영국 토리당(보수당) 전 의원은 "정부가 옳은 결정을 했다"고 평했다. 영국 정부는 프로그램 오류로 이 사태를 촉발한 일본 후지쓰에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다만 가디언은 법률 전문가를 인용해 정부의 이번 결정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텔레그래프는 이 사건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일도 하지 못하는 등 실제 피해액은 정부 보상금보다 더 크다는 이들도 있어 합의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짚었다.
임선영(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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